------------------------------------------------------------------------------------------------------------- Beautiful Stranger w. Lorina 2012.06.02~2012.10.23 이 텍스트는 위의 기간 동안 EXO 트윈 홈 TwiN MooN (http://twinmoon.ivyro.net)과 카이x디오 커플 홈 CCTV (http://kai-do.net)에서 연재되었습니다. 이 텍스트 파일은 공유 가능하나, 내용 수정은 절대 불가합니다. 단어나 문장은 물론 띄어쓰기, 온점 하나도 수정하지 마세요. 2차 가공이나 등장인물의 이름을 바꾸는 행위 또한 허용하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만들어 배포한 것 외의 텍스트 파일을 만들거나 공유하지 마세요. ------------------------------------------------------------------------------------------------------------- 언젠가 TV 다큐멘터리에서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크기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모양과 색으로 이루어진 동물들의 무리 같은 것 말이다. 모두 같은 교복을 입고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종인은 생각했다. 모래알처럼 수많은 아이들이 다글다글 모여 있으나 그들은 모두 유기적인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구성물처럼 보였다. 줄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양새가 신경을 거슬렀다. 부러 교복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삐딱하게 섰다가 운동장을 지배하고 있는 룰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대열을 이탈한 종인은 단번에 학생들을 감시하던 학생 주임의 눈에 띄었다. 야, 거기! 운동장에 울리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소리가 난 쪽으로 우르르 고개를 돌렸다. 고요하던 공기의 흐름에 파열음이 나기 시작했다. 무리가 흐트러트린 모양새가 궁금해 종인은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종인이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목소리도 무시하며 서있는 탓에 웅성거림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종인의 입 꼬리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릴 즈음이었다. 소란의 근원을 찾으려 웅성거리는 모래알 같은 아이들 사이에서 오로지 앞만 바라보는 얼굴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주변의 웅성거림은 귓가에 스치지도 않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 고요했다. 하얀 얼굴에 박힌 새카만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시선을 앞으로 고정하고 있었다. 꾹 다문 입매가 야무졌다. 끝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와 목을 조를 것처럼 단정하게 멘 넥타이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자켓 안으로 숨겨진 소매도 손목을 조르듯이 끝까지 단추가 채워져 있을 것이다. 종인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야, 쟤 누구야?" 제자리에 서서 소란스러움을 즐기는 종인을 비웃고 있던 세훈이 얼결에 끌려나왔다. 미친놈아, 갑자기 뭐야. 우악스럽게 잡힌 손목이 아픈 듯 신경질적으로 반응한 세훈은 종인이 턱 끝으로 까닥거리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도경수?" "이름이 도경수야?" "어." 이름도 꼭 저 같네. 콱 깨물어버리고 싶게. 잠시 동안 소란으로 인해 혼란을 겪었던 아침조례는 종인이 경수에게 시선을 빼앗긴 사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직도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종인을 돌려놔야겠다는 의지를 가진 학생 주임이 대열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오고 있을 때였다. 종인은 성큼성큼 아이들이 서 있는 대열을 흐트러트리며 제멋대로 열을 가로질렀다. 뭐야, 뭐하는 짓이야! 침범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을 침범당한 아이들이 이전보다 더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종인의 움직임에 따라 아이들이 갈라지면서 길이 생겼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사이, 종인은 마침내 경수 앞에 섰다. 어떤 혼란에도 흔들리지 않던 도경수가 그제야 종인을 돌아보았다. 눈동자가, 거짓말처럼 새카맸다. "도경수." 종인은 최대한 상냥하게 보이길 바라면서 경수를 향해 웃어 보였다. "김종인이야." 누군가 저 미친 새끼 왜 저래? 하며 짜증스러운 듯 말했고, 곧 이어 너 제자리로 안 돌아가? 하며 흥분한 학생 주임이 크게 외쳤다. 짜악-. 모든 소란은 뺨을 치는 마찰음이 생각보다 더 크게 울려,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듯 사방이 온통 고요해졌다. 갑작스레 뺨을 맞은 도경수는 종인이 내려친 악력을 못 이기고 고개가 꺾였다. 하얗고 긴 목덜미가 부드럽게 휘어진 것이 눈에 밟혔다.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경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제 뺨을 감싸 쥐었다. 손 아래로 보이는 도톰한 입술이 들썩이는 것을 보며 종인은 저에게 퍼부어질 도경수의 반응을 기다렸다. 흥분해서 쌍욕이라도 퍼부을까, 아니면 아프다고 앓는 소리부터 먼저 낼까―. "이, 미친 새끼가!" 설레던 종인의 기다림은 학생주임이 우악스럽게 다가와 팔목을 붙드는 걸로 끝이 났다. 너 이 새끼, 개놈의 새끼, 무슨 놈의 새끼, 한순간에 별의 별 부모를 다 두게 된 종인은 학주에게 끌려가면서도 끝까지 도경수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시야에 잡힌 도경수는 아주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듯 했으나,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똑바르게 서서는 앞을 바라보는 게 다였다. - Beautiful Stranger - 도경수는 매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정확히 6시 반에 정문을 통과했다. 등교시간이 7시 40분 까지였기 때문에 보통 아이들이 본격적으로 등교하는 시간은 7시. 정문에서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하는 선도부도 학생주임도 모두 그 시간 즈음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도경수가 학교에 도착하는 건 매우 이른 시간이었다. 안 그래도 빠른 등교시간이 버거워 한 번쯤은 지각할 법도 한데, 도경수는 매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정확한 시간에 정문을 통과했다. 혹시 생활지도에서 걸릴 위험이라도 있는 것일까. 의심해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문을 통과하는 도경수의 머리카락은 항상 규정에서 벗어나지 않는 길이와 색으로 차분했고, 목 끝까지 채운 단추와 끝이 빳빳한 하얀 칼라, 틈도 없이 메여있는 넥타이와 같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옷차림은 다른 학생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사례로 소개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일찍 도착해서 도경수가 가장 먼저 하는 일이라는 것이 황당했는데, 아무도 없는 교실에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은 도경수는 본관 뒤에 있는 조그만 화단에 물을 주었다. 이 이야기를 처음 세훈에게 전해 들었을 때도 또 그걸 직접 눈으로 목격했을 때에도 종인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도 안 나왔다. 종인이 새벽같이 학교에 도착했던 기억이라고는 전날 새벽 늦게까지 좆 빠지게 놀다가 미처 집에 못 들어갔거나 정문에 일렬로 나란히 서있는 재수 없는 선도 부원들의 상판대기가 보기 싫었을 때뿐이었다.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도 종인은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학교에 있는 시간동안 도경수는 닿으면 베일 것처럼 칼 같은 옷차림을 하고 다녔으나, 화단의 꽃에 물을 줄 때만큼은 소매를 접어 올려 하얗고 가느다란 팔뚝을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도경수는 정해진 수업 시간대로 움직였기에 수업에 필요해 음악실이나 운동장에 가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교실 안에 있었다. 점심시간에는 굳이 자신의 교실과 동떨어진 1층 복도 끝의 도서실에 가서 시간을 보냈는데 아주 가끔씩 드물게는 아침에 갔던 화단을 또 찾는 경우도 있었다. 교실 안에서 도경수는 대체로 모든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정작 가까이 하는 아이들은 없어보였다. 도경수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자신의 시선을 잡아끌었던 것처럼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데 막상 다가가면 아무런 영향력도 행세할 수 없어 무기력한 기분만 느끼게 될 것 같은, 건드려보고 싶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위기 같은 게 존재했다. 종인은 며칠 전 세훈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침 조례 시간에 벌인 소동으로 학생 주임에게 한바탕 깨지고 들어온 직후였다. 종인은 저를 몹쓸 물건 보듯이 바라보는 세훈의 시선 따위는 가볍게 흘리며 다짜고짜 물었다. "어떤 놈이야?" "도경수?" 마치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 세훈이 되물었다. 무슨 얘기가 나올까 싶어 종인이 흥미로운 듯 고개를 끄덕였더니 세훈이 단번에 대답했다. "몰라." "몰라?" "어. 다들 그래." 무심한 세훈의 대답에 종인은 잠시 멈췄다가 입술 끝을 올려 세훈의 말을 비웃었다. "다른 애들이랑 너는 다르지." 종인이 손으로 가슴께를 툭, 치는 것에 맞춰 세훈이 눈을 깜빡였다. 세훈은 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정보를 알았다. 세훈이 모든 정보를 '안다'는 것이 학년, 반, 이름, 혹은 사는 곳과 같은 일차원적인 게 아니라는 걸 종인은 알고 있었다. 성적이 어떠한 변화를 보이는지, 가족들과 관계는 어떠한지, 가방 속에 뭘 숨기고 다니는지, 수업이 끝나고 무얼 하고 다니는지, 누굴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혹은 사귀고 싶은지 음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까지-. 개인이 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세훈은 다 알았다. 수집광처럼 편집적으로 학교 내에 모든 사람들의 신상정보를 모아대기는 했으나, 채집한 정보를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세훈이 전혀 상관없는 자신의 치부까지 알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런 세훈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종인이 유일했다. 물론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도 세훈일테고. "그럼 나도 모른다고 해둬."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대답에 종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재밌는 놈이네. 네가 모르는 것도 다 있고." "어떤 놈인지는 모르고, 학교에서 뭘 하고 다니는지는 조금 알지." 세훈의 대답에 종인이 눈빛을 빛냈다. 그거라도 말해줘 봐. 종인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아이들과는 체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동물인 것처럼 벤치에 얌전히 앉아있는 도경수를 바라보았다. 오늘 도경수는 점심시간에 늘 하던 대로 고리타분한 도서실에 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본관 뒤에 있는 화단으로 가는 남사스러움을 보이지도 않았다. 대체로 짜여진 행동패턴대로 움직이는 도경수는 점심시간만큼은 가변적인 시간을 보내는 듯했다. 벤치에 앉은 도경수는 사내새끼 주제에 다리 사이를 얌전히 모으고 허벅지 위에 손을 얹은 바른 자세로 앉아, 운동장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종인은 마주 닿은 무릎 사이를 보면서 입술을 잘근 씹었다. 가지런히 맞닿아있는 무릎 사이를 벌리고 싶었다. 아침 조례에서 도경수를 처음 봤을 때 종인은 알 수 있었다. 김종인은 도경수를 '본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다. 종인은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여 도경수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사람이 어느 정도 가까이 다가오면 누가 제 곁에 오나싶어 한번쯤은 돌아볼 법도 한데, 도경수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종인이 두어 발자국 남겨놓은 거리에 멈춰 섰을 때까지도 도경수의 시선은 줄곧 한결같이 한곳만을 향했다. 종인은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어 입가가 실룩거렸다. 불과 며칠 전의 기억이 생생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뺨을 때릴 생각은 없었다. 그게 도경수의 반응을 별로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걸 종인은 이미 경험으로 잘 알았다. 거침없이 목표를 향해 걷던 종인은 경수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줄곧 한곳에 고정되어있던 시야가 가로막힌 경수는 어쩔 수 없이 종인을 볼 수밖에 없었다. 종인은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신사적인 방법을 택했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깜빡,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 유리구슬 같은 새카만 눈동자가 숨겨졌다가 다시 드러났다. 홀로 다른 곳에 있는 듯 도경수를 둘러싸고 있던 고요한 공기가 가느다랗게 뻗은 속눈썹을 타고 미세하게 흔들렸다. "……." 도경수가 눈동자를 도륵 굴려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김종인."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로 도경수가 이름을 불렀다. 뺨을 때린 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고, 종인은 생각했다. 도경수가 무슨 일이냐는 듯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첫 만남부터 뺨을 때린 사람에 대한 반응치고는 얌전하기 짝이 없었다. "너 담배 있냐?" 종인의 물음에 경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픽 웃었다. 단정한 도경수의 옷차림을 본다면 누가 봐도 비웃을 물음이었다. "없어." "그럼 라이터는?" "없어." "그럼, 콘돔은 있냐?" "……." 뭐라고 말하고 싶은 듯 살짝 벌려졌던 입술이 이내 꼭 다물렸다. 이제 보니 도톰한 입술이 제법 예쁜 색을 띄고 있었다. 빨아들이면 새콤한 과즙이라도 나올 것 같다. "나랑 한 번 할래?" "……." "오빠가 뿅 가게 해줄게."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간지러운 듯 작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짧은 시간동안 종인은 도경수의 다음 반응을 예상했다. 단정하고 얌전한 걸 보니 당황해서 말도 못하던가 수치심에 얼굴을 붉게 물들인다거나 혹은 좀 더 강단이 있다면 종인을 밀쳐낸다거나 욕설을 내뱉는 게 종인이 생각한 반응의 전부였다. "한 번 해주면." 그러니까 이렇게 제 넥타이를 쥐고 몸을 끌어당기며 똑같이 귓가에 속삭이는 도경수는 종인의 머릿속 어디에도 없는 반응이었다. "넌 뭘 해줄래?" 아, 얕봤다. 종인은 넥타이를 꽉 쥐어 잡은 조그만 손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도경수에 대한 정보를 수정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 * *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고등학교는 으레 그렇듯이 시끄럽고 우악스러우며 난잡했다. 온몸에 도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놈들은 교실이고 운동장이고 어디서든 나뒹굴기 마련이었고, 삼삼오오 모여 있는 놈들은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와 함께 밥 먹듯이 음담패설을 해댔다. 종인은 하루도 못갈 시시껄렁한 농담도 몇 반의 누가 어느 여고의 누구를 따먹었다더라 하는 과장 섞인 경험담 따위에도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정해진 규칙대로 살아본 기억이 별로 없는 종인에게 그런 경험담들은 충격적이지도 새롭지도 않았다.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동네에서 치고 박는 수준이 아니라 소위 조폭들이 구역싸움 하듯이 피 터지는 싸움을 밥 먹듯이 해왔고, 발랑 까진 계집애들이 반했다며 제멋대로 들러붙는 것도 거절해본 적이 없어서 섹스에 대한 환상이나 설렘도 딱히 없었다. 종인에게 섹스는 상대를 정복하는 방식만 다를 뿐 패싸움과 별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이렇게 타인에게 관심이 넘치는 건 김종인 인생에서 매우 드문 일이란 얘기다. 종인은 저를 똑바로 바라보던 하얀 얼굴을 떠올렸다. 아니, 새삼스레 떠올릴 것도 없이 줄곧 도경수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눈도 코도 입술도 하나하나 정성들여 고른 듯 예쁜 걸로만 모여 있는데 얼굴에 군더더기가 하나 없었다. 돈을 처발라서 그렇게 만들고 싶어도 쉽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단정하게 생긴 대로 모범적으로 살면서 얌전이나 떨 줄 알았더니 하는 짓이 제법 앙큼 떨 줄도 아는 듯했다. 완만한 선으로 그려진 얼굴 안에 크고 동그란 눈동자, 동그마한 코끝, 도톰한 붉은 입술, 단정한 표정, 올곧은 시선, 흔들림 없는 목소리, 바른 자세…. "터트리고 싶다." 조물조물 하다가, 팍-. 창틀에 턱을 괴고 앉은 종인이 멍하니 중얼거리자 앞에 앉아있던 세훈이 못들을 소리를 들은 듯 종인을 흘겨보았다. 저를 몹쓸 물건 보듯이 하는 세훈의 표정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아, 미친놈." "너만 하겠어." "내가 너보단 덜해." 서로를 알고 난 후 세훈이 습관처럼 종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종인은 항상 개소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데." 네 마음에 드는 것도 있다니, 너도 사람이네. 덧붙이는 세훈의 말을 흘려들으며 종인은 도경수가 마음에 드는 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타인의 신상을 털어서 수집하는 세훈이 도경수에 대해 별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 높은 점수를 줄만 했으나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도경수가 아직 한 번도 제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항상 예상을 빗나가는 것은 종인 쪽이었기 때문에 지금 이 관계는 상당히 흥미를 돋웠다. 한 번 자자고 치댄 건 실제로 섹스를 할 생각이 있었다고 하기보다는 도경수가 당황하거나 수치스러워하는 걸 보고 싶어서였다. 고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고 싶어 조약돌을 던졌는데 도경수는 흐트러지기는커녕 오히려 제게 맞받아쳐왔다. 넌 뭘 해줄 건데. 저를 똑바로 보고 묻는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투명한 갈색으로 빛났다. "말했잖아. 뿅 가게 해준다고." "그걸론 부족하지." "그럼, 어떻게 해줄까?" 종인의 물음에 도경수는 넥타이를 쥔 손을 풀었다. 몸을 끌어당기는 악력에서 벗어나니 그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흥미 없어." 니가 뭐라고. 덧붙이는 말에 종인은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종인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였다. 벤치에 앉아있던 도경수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뒤도 안돌아보고 운동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시 눈앞에 붙들어놓았던 도경수는 순식간에 종인을 제 세상에서 완벽히 배제시켰다. "야, 쟤 누구야." "누구."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크게 관심이 없던 종인이 요즘 들어 유난히 묻는 게 많아졌다. 세훈은 귀찮은 듯 창문 너머 종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무슨 일 때문인지 한 아름 책 더미를 안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세훈이 미간을 슬며시 찌푸리는 사이 선생님께 격려를 받은 이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아, 학생회장." "이름." "김준면." 세훈이 읊어주는 이름을 들으며 종인은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준면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적어도 학생회장 정도는 알아야지." 그딴 걸 내가 왜 알아야 돼. 종인은 씹어뱉듯 말했다. 창문 너머 멀리서 본 것이지만 알 수 있었다. 어제 도경수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서 다가간 놈이었다. 얼굴은 하얘서 교실에 처박혀 고리타분하게 책이나 파고 있을 것처럼 생긴 게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뒤엉켜 농구를 하고 있다가, 게임이 끝난 모양인지 도경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도경수는 누가 앞에 있었냐는 듯 종인은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이를 향해 걸어 가버렸다. 종인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도경수는 벤치에 얌전히 앉아 그 재수 없는 녀석을 줄곧 보고 있었다. 기집애같이 남사스럽게 왜 농구하는 새끼를 쳐다보고 지랄이지? 순간 불쾌한 기분이 치솟았다. "왜, 학생회장이 너 잘릴 뻔한 거 살려준 적도 있는데." 양심 없는 놈아. 타박하는 세훈의 목소리에 생각이 났다. 버스로 고작 두정거장 떨어진 K고와 붙었을 때 일이었다. 종인은 평소 K고에서 논다는 새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저도 시도 때도 없이 쌈박질하고 기집애들이랑 붙어먹기 일쑤였지만 그 학교에서 날리는 놈들은 주변에서 논다는 놈들 중에서도 질적으로 가장 최악이었다. 하는 짓도 마음에 드는 거라곤 하나도 없는데 저 잘났다고 거들먹거리는 꼬라지가 재수가 없어서 언제고 걸리기만 하면 죽사발을 만들어 놓을 거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서 싸움이 붙었을 때 종인은 반쯤 죽여 놓을 생각으로 작정하고 나갔다. 사실 적당히 신경을 긁으면 알아서 예뻐해 주고 멈췄으련만 쓸데없이 자존심만 센 모양인지 졌다는 걸 인정 못하고 바득바득 덤벼대기에, 시멘트 바닥에 얼굴을 갈아버리는 것으로는 성이 안차서 화장실에 끌고 들어가 대걸레로 후장을 뚫어 놨다. 보통 패싸움을 하다가 쳐 맞고 입원을 하게 되면 쪽팔린 줄 알아서 쉬쉬하고 넘어가는데, 그 새끼는 후장까지 뚫린 주제에 뭐 자랑이라고 학교까지 와서 고소를 하네 마네 지랄을 떨었던 기억이 난다. 그 일이 커져서 종인은 교무실까지 불려갔다. 성질 꼴리는 대로 살면서도 제 딴에는 처신 잘 하고 살았다고 생각한 종인에게 나름 스크래치를 남긴 일이었다. 그때 학생 주임은 종인을 정학을 시켜야 한다느니 어쩌느니 노발대발을 해서 종인을 꽤나 피곤하게 만들었었다. "저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서요, 아무나 팬 건 아니에요." 잘못했다고 한참을 숙이고 들어와도 부족할 판에 종인이 말했더니 학생 주임은 당장이라도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허, 이 새끼 봐라? 입만 살아서."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래서 네가 잘 했다고?" "그 새끼가 멀쩡한 놈들 후장도 뚫고 다니는 놈인 거 아셨어요?" "이놈이!" 버럭 소리를 지르는 모양새가 저러다 뒷목잡고 쓰러지는 건 아닐까 싶어 종인이 다 걱정이 될 정도였다. 종인은 어렸을 때부터 변칙적이고 무질서한 제 성향을 잘 알았고, 그런 자신을 만족시키는 데 폭력만큼 쉬운 것도 없다는 것도 일찌감치 깨달았다. 애초에 타고난 성향은 어쩔 수 없었고 머리 아프게 타고난 걸 바꿔보려고 고민하며 끙끙대는 것도 딱히 성격에 맞지 않았다. 제 멋대로 꼴리는 대로 사는 것 같았지만 그런 종인에게도 나름의 룰은 있었다. 최소한 평범하게 사는 얌전한 놈들은 건드리지 않는 것. 그러니까 종인은 그 새끼는 갈아놔도 시원찮을 놈이라서 반 죽여 놨다고 말하고 있었다. 교무실에 있던 선생들이 모두 정말 이 미친놈은 뭔가 싶어서 헛웃음만 흘리고 있을 때였다. 교무실에 볼일이 있어서 들렀다가 종인과 학주의 어처구니없는 대화를 듣느라 모두 멈춰버린 탓에 얼결에 붙들린 준면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아, 죄송해요." 제 웃음소리가 크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사과를 한 준면이 종인에게 다가왔다. 키도 한 뼘이나 작아 보이는 게 마치 저를 내려다보듯이 웃고 있어서 재수 털렸던 기억이 난다. "착하구나, 너." 종인은 물론이거니와 교무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준면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제 귀의 성능을 의심할 때였다. 준면은 손을 들어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이 종인의 엉덩이를 툭툭 때리기까지 했다.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세훈이 이 대목에서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웃어댔기 때문에 종인에게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었다. "선생님, 한 번만 봐주세요." "아, 그게…." "제 얼굴을 봐서라도." 저 면상이 잘나면 얼마나 잘났다고 저렇게 당당할까. 생각한 종인을 비웃듯 학생 주임은 준면 앞에서 쩔쩔 매더니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하고는 종인을 풀어주었다. 일이 커진 탓에 이번엔 정학 먹으면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하던 종인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안돼서 복도에 나와서도 멀뚱거리고 있었다. 그런 종인에게 다가와 준면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두 번은 없어." 그래, 확실하게 생각났다. 김준면. 그 재수 없는 면상을 도경수가 줄곧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뒤틀렸다. "야, 어디가!" "도서실." 김종인이 책을 보러 도서실을 갈리는 없고 순전히 도경수를 괴롭히러 간다는 걸 깨달은 세훈이 혀를 쯧 찼다. 저거 완전히 미쳤네. 새삼스러운 듯 말하는 세훈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종인은 교실을 나섰다.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종인은 어느새 뛰고 있었다. 쿵, 쿵, 쿵 뛰는 발걸음에 맞춰 심장도 같이 뛰었다. 벌컥, 도서실 문을 열었더니 조용히 책을 보고 있던 아이들이 모두 화들짝 놀라 동그란 눈으로 종인을 바라보았다. 성큼성큼 도서실 안으로 침범하듯이 들어간 종인은 나란히 늘어선 책상과 책장 사이를 온통 다 헤집고 다녔다. 도서실을 돌아다니며 있는 얼굴들을 확인하던 종인을 한바퀴를 모두 돌고 나서야 도경수가 도서실에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봤자 어차피 답은 몇 개 없었다. 찾았다. 도서실이 있던 건물에서 본관까지 뛰듯이 걸어간 종인은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도경수를 발견했다. 조그마한 몸이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말아놓은 듯 더 조그맣게 보였다. 도경수는 무릎을 감싸고 앉아 흙을 뚫고 나온 푸릇한 잎사귀를 살펴보더니 손끝으로 잎사귀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어쩐지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로 낯간지러운 장면이었다. "지극정성이네." 종인의 목소리가 적막을 갈랐으나 도경수는 고개를 돌리는 기색도 없었다. 종인이 바로 옆으로 다가갈 때까지도 도경수는 열심히 화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왜 이렇게 열심히 해?" "부탁 받아서." "누구한테?" "……." 물었더니 대답해주고 싶지 않은 듯 입술이 꼭 다물렸다. 벌리고 싶다. 예쁜 색을 띈 도톰한 입술이 다물린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고 싶었다. 종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경수는 볼일을 다 끝낸 듯 손을 털고 일어섰다. 도경수가 자리에서 일어 선 것과 종인이 가느다란 손목을 붙들어 맨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종인은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리던 도경수를 억지로 붙잡고 입을 맞췄다. 뭐, 야-. 당황해서 거부의 말을 하는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다. 순진하긴. 뜨겁고 좁은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더니 도경수는 주먹을 쥐고 가슴팍을 퍽, 퍽 내리쳤다. 그러나 체격 차만큼 힘 차이도 컸기 때문에 종인이 손목을 붙잡고 몰아붙이자 도경수는 그대로 제압당해버렸다. 입안을 제멋대로 휘저었더니 도망치려고 애쓰는 게 오히려 혀가 더 뒤엉키게 만들었다. 물컹한 혀가 엉키고 타액이 뒤섞이고 뜨거운 호흡이 피부에 와 닿았다. 도경수는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고 버둥거리는 걸 멈추더니 질끈, 이로 혓바닥을 깨물었다. 씨이발, 그러면 그만 둘 줄 알았지? 입안으로 비릿하게 피가 번지는 것을 느끼며 종인은 더 깊게 혀를 섞었다. 코끝으로 희미하게 후끈한 피 냄새가 맡아졌다. 흐, 으읏…. 어쩔 수 없이 앓는듯한 신음소리에 흥분이 치솟았다. 이, 씨, 발. 입속에서 도경수가 잔뜩 웅얼거리며 말을 짓씹는 게 느껴졌다. 종인은 흥분해서 당장이라도 쌀 것 같았다. 도경수는 순순한 맛이 없어서 좋았다. 도경수가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부수고 싶은 욕망이 마구 들끓는다. "아, 이런." 격정적인 키스는 등 뒤의 인기척에 끝이 났다. 종인이 몸을 떼어내자 도경수가 분한 듯 숨을 몰아쉬며 씩씩거리는 게 보였다. 쪼그만 게 씩씩거리니까 귀엽네. 종인은 손등으로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훔쳤다. 끈적하게 피가 뒤섞인 타액이 손등으로 묻어났다. "내가 방해했나봐." 종인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기도 전에 도경수가 왈칵 얼굴을 붉히더니 종인을 노려보았다. 갑작스럽게 적의에 불타는 눈빛이 꼴리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등 뒤를 돌아보니, 김준면이 서있었다. 재수 없는 하얀 얼굴이 그 언젠가처럼 자애롭게 웃으며 종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빠른 삼자대면이었다. * * * "방해한 건 알아요?" "미안." 종인이 물었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준면이 대답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말하니 별로 미안한 마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종인은 입가에 미소를 박제한 게 아닌가 싶은 준면을 향해 똑같이 웃어주었다. "알면 꺼져." "그렇게는 못하겠다. 선약은 나랑 해서." 도경수랑 별다를 바 없이 하얗고 조그매서 한주먹거리도 안될 것처럼 생긴 게 한마디도 안 진다. 아니, 오히려 저를 나무라는 듯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언젠가 교무실에서 어린아이 취급당했던 게 떠올라버렸다. "빨리 볼 일 보고 비켜줄게." "선배." 준면의 대답에 경수가 당황한 목소리로 준면을 불렀다. 선배. 낯설고 기묘한 호칭이 귓바퀴를 타고 들어왔다. 준면은 곤란한 표정으로 서있는 경수를 지나 화단 앞으로 다가가더니, 조금 전의 도경수처럼 무릎을 굽혀 쪼그리고 앉았다. 이제 막 푸릇하게 나기 시작한 잎사귀들을 살피는 준면을 보고 종인은 누가 도경수에게 본관 뒤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화단을 봐달라고 부탁했는지 알아버렸다. "잘 자라고 있네." 꼼꼼하게 싱싱한 새싹들을 살피던 준면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서 기쁜 표정으로 경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부탁하길 잘 했다."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맞춰 도경수가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웃음을 숨기고 싶은데 미처 숨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도경수는 종인의 존재는 물론이거니와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종인은 또 다시 완벽하게 도경수의 세상에서 배제되었다. 종인은 수줍은 미소를 띤 경수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상처 난 혀를 굴려 입안을 쓸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축축한 입안에서 굴려지는 혀가 온통 따끔거렸다. 아직 다 가시지 않은 피 냄새가 목구멍을 간질였다. 허우대 멀쩡한 사내새끼 둘이서 조그만 화단 앞에 서서 시시덕거리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더 이상 얌전히 기다려 주는 것도 지루하기도 해서 종인은 덥썩 경수의 손목을 붙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랑 찐하게 키스까지 해놓고서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볼일 끝났으면 데려간다." 갑작스레 손목을 붙들려 얼결에 몇 발자국 움직인 경수가 곧 상황을 파악한 듯 종인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최대한 끌려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나 몇 번의 버둥거림 끝에 결국 악력의 차이를 이기지 못한 경수는 종인에게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거의 악다구니를 쓰면서 힘겨루기를 하던 둘은 서서히 준면에게서 멀어져갔다. 힘의 차이를 느낀 도경수가 스스로는 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할 것을 깨닫고 고개를 돌려 간절한 표정으로 준면을 바라보았다. 종인은 경수의 시선을 따라 어느새 멀어진 화단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 마, 라고 말하든지 혹은 직접적으로 다가와 도경수의 손목을 붙들고 있는 제 손을 떼어놓을 줄 알았던 준면은 처음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둘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정말 얼굴에 미소를 박제해 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줄곧 웃는 표정이 신경을 거슬렀다. 정말이지 재수 없는 면상이었다. 준면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목표로 경수를 질질 끌고 무작정 걸었더니 어느덧 학교에서 가장 외진 소각장까지 와버렸다. 정작 본관과는 얼마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끌려오는 내내 도경수가 어찌나 발버둥을 치던지 종인은 평소보다 힘을 배로 썼다. 손아귀에 잡힌 손목이 조금만 더 힘을 주었다가는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데, 경수는 끌려오는 내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붙들린 손을 벗어나려고 악다구니를 썼다. 결국 외진 소각장까지 끌려온 도경수는 생명의 위협이라도 느꼈는지 자유로운 나머지 손으로 종인의 손가락을 떼어내려고 애쓰다가 그마저도 안돼서 손톱으로 손등을 할퀴었다. 와, 씨발. 진짜 성질 뻗치게 하네. 단정하게 잘 깎인 둥근 손톱이 어찌나 거칠게 긁어대었는지 손등의 살점이 떨어져나갔다. 얇은 피부의 표피가 벗겨져나가는 고통에 종인은 그제야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같이 발걸음을 멈춘 경수가 씩씩거리며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퍽-! 거친 숨소리 사이로 뺨을 때린 소리 치고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갑작스러운 폭력에 도경수의 고개가 힘없이 팩 꺾였다. 우악스럽게 내리친 손에 뺨을 맞은 도경수는 아픈 곳을 감싸 쥘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픽 웃음을 흘렸다. 힘 조절을 못하고 내리쳤더니 입술이 터진 게 보였다. 새빨간 혓바닥이 날름 붉게 터진 입술을 더듬었다. 하…. 터진 입술 새로 바람 빠지는 듯 허탈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종인이 가만히 서서 그 모양새를 보고 있는 사이 잠시 멈췄던 도경수가 다시 손목을 비틀어 빼려고 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가느다란 손목을 모조리 분질러 놓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잡힌 손목의 악력이 꽤나 세서 신음소리라도 낼 법한데 도경수는 숨소리를 내는 것조차 수치스러운 듯 오히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새끼 독한 거 봐라. "소리 내." "……." 힘을 쥔 손을 슬쩍 비틀었더니 단정한 미간이 고통으로 잘게 찌푸려졌다. "소리." 도경수는 지금 김종인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는 듯했다. 머리끝까지 홧홧하게 열이 치솟아 뇌가 온통 곤죽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종인은 얇은 손목을 붙들고 아예 팔을 꺾어버렸다. 흐, 앗…. 다물렸던 입술이 발작적으로 열리면서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종인은 붙들고 있던 손을 떼고 양손으로 경수의 턱을 그러쥐었다. 조물조물 손가락으로 살덩이를 만져대었더니 뺨을 맞아서 부어터진 얼굴로 도경수가 저를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도톰한 입술이 터져서 더욱 붉게 부풀어 오른 것이 보였다. 과일의 살점을 씹듯이 하나하나 잘근잘근 다 씹어 먹고 싶다. "입 벌려." 종인의 명령에 경수는 다물린 입술을 더 꾹 다물더니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부어터진 입술을 깨물어 쓰라린 듯 경수의 표정이 조금 전 보다 더 고통스럽게 변했다. 종인은 열이 올라 도저히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벌리고 싶다. 벌리고 싶어. 엄지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문질거리다 종인은 우악스럽게 입술 사이로 가운데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이 사이에 깨물린 입술의 여린 살점을 억지로 벌리고 들어간 손가락은 단단히 다물린 고른 치열에 진입이 막혔다. 종인은 턱을 부술 것처럼 손에 힘을 주었다.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고통으로 벌려진 틈 사이를 비집고 종인의 손가락이 거침없이 침범했다. 뜨겁고 축축한 입 안으로 들어간 손가락 끝에 말캉한 혀가 닿은 순간,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황홀한 감각도 잠시, 도경수가 아득-, 소리가 나도록 손가락을 콱 깨물었다. 그래, 순순히 벌려줄 리가 없지. 화가 치솟는 것인지 흥분이 휘도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뇌를 마구 뒤흔들었다. "소리 내." "흐, 으." "울어." 소리. 신음 소리. 우는 소리를 듣고 싶다. 미치겠다. "흐, 으, 아…." 어쩔 수 없이 흐느끼는 소리를 내면서 경수는 당장이라도 죽일 것 같은 시선으로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동자에 적의가 가득 찼다. 새까만 눈동자에 제 얼굴이 비치는 걸 빤히 바라보며 종인은 물었다. "너 김준면 좋아하냐?" 종인의 물음에 경수가 다시 한 번 발버둥 쳤다. 아, 입을 억지로 벌려놔서 대답을 못하나봐. 종인은 손가락을 빼고 우악스럽게 쥐고 있던 경수의 턱을 놓았다. 종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경수는 탈진할 것 같은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걔 보면 꼴려? 좆질 하고 싶어? 쑤시고 싶냐?" "닥쳐, 씨발. " 도경수 아직 안 죽었네.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는 얼굴이 새삼 예뻐서 빤히 들여다보며 종인이 말했다. "아-, 미안." "……." "학생회장이 너한테 박아줬음 좋겠구나?" 걸러지지 않은 종인의 말에 하얀 경수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소름 돋는듯한 표정에 기분이 좋아진다. "네 머릿속엔 그딴 거밖에 안 들어있냐?" "난 너만 보면 꼴려서." 종인의 말에 경수가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선배한테 그런 더러운 감정 느낀 적 없어." "더러워?" "깨끗하진 않지." 생각지도 못한 경수의 대답에 종인은 멍한 듯 잠시 멈췄다가 미친 듯이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허리까지 꺾어가며 낄낄거리는 종인을 경수가 미친놈 보듯이 바라보았다. 아, 걸작이다. 너무 웃어서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지경이었다. "너 자위는 해봤냐?" "……." "설마." "난 너 같은 놈 아니라고." 이젠 아예 저를 벌레 보듯이 본다. 한참을 종인과 악다구니 한 탓에 옷차림이 잔뜩 흐트러진 게 거슬리는 듯 경수가 셔츠 깃을 바로하고 넥타이를 다시 메었다. 단정하게 다듬어지는 옷차림을 보며 종인은 문득,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도경수는 항상 지나칠 정도로 단정했다. 학교생활은 물론이거니와 걸음걸이도 교복차림도 심지어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는 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항상 기준에 맞는 길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의 손등을 할퀸 손톱도 끝까지 깨끗하게 잘려있었다. "너도 그닥 정상은 아닌 거 같은데." 종인의 말에 붉은 자욱이 남은 손목을 매만지던 경수가 잠시 행동을 멈췄다. 더러워. 굳이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지만 지금 도경수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소하게는 자신의 옷차림에서부터 종인이 하는 말과 행동, 이 상황 자체도 모든 게 도경수에게는 더럽게 느껴지는 듯했다. "좆이 없다거나." 여과 없이 툭 튀어나오는 종인의 말에 경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종인을 바라보았다. 종인은 불쑥 손을 내밀어 경수의 바지춤을 꽉 쥐었다. "읏." 없는 건 아니네. 슬며시 웃은 종인은 바지 너머로 느껴지는 경수의 것을 쥐고 비비기 시작했다. 타인의 손길에 약한 곳을 마구 쥐고 흔들었더니 도경수가 허리를 떨면서 다급하게 몸을 앞으로 숙였다. 소리라도 새어 나갈까봐 이미 너덜해진 입술을 깨물더니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모양인지 필사적으로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바지 너머로 만진 것뿐인데 생각보다 반응이 지나치게 예민했다. 하, 설마, 설마 했더니. 진짜? 종인의 가슴팍을 밀쳐낸 경수의 얼굴이 붉었다. "도경수. 낭랑 십 팔세." "……." "씹질 하기 딱 좋은 나이네." 18세가 되도록 자위 한 번 안 해본 몸이라니. 제 기대보다 훨씬 더 재미있는 놈이었다. * * * 등교시간을 한참 넘기고 2교시까지도 끝난 쉬는 시간, 온갖 소음이 뒤섞인 소란스러움은 종인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나직이 가라앉았다. 특별히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파괴력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종인이 바로 그랬다. 뒷문을 열고 게으르게 들어오는 종인의 발걸음을 따라 미처 숨기지 못한 몇몇 시선들이 옮겨 붙었다. 세훈은 종인이 교실에 들어서면서부터 공기의 무게가 달라지는 걸 피부로 느꼈다. 거칠 것 없는 혈기왕성한 사내자식들에게 폭력적으로 무질서하게 움직이는 종인은 존재 자체로 맹렬한 동경이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종인은 단순히 자신의 성향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훈의 생각에는 특별히 어떤 행동을 하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종인의 존재 자체가 폭력적이었다. 종인은 자신에게 따라붙는 끈덕진 시선들에는 관심조차 없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비어있는 제 자리에 앉았다. 어깨위에 대충 걸치고 있던 가방을 책상위에 내려놓는 것에 맞춰 앞자리에 앉아있던 세훈이 몸을 돌려 종인을 보았다. "일찍 왔다." 세훈의 말에 종인이 입술 끝을 올려 피식 웃고 말았다. "어제는 또 무슨 짓거리를 하고 놀았길래-." 말을 하던 세훈은 무심코 책상위에 얹어진 종인의 손가락을 보고 서서히 목소리를 줄였다. 종인의 양 손은 손가락 마디마다 다닥다닥 밴드가 붙어있었다. "너 요새 고양이 키워?" "뭐?" 눈을 가늘게 뜨고 묻는 세훈에게 종인이 어처구니없는 듯 대꾸했다. 어렸을 때 종인도 여느 또래아이들처럼 애완동물을 길렀다. 부모님은 작게는 학교 앞에서 파는 조그마한 병아리부터 털이 북슬북슬한 솜뭉치 같은 귀여운 강아지까지 종인에게 친구로 주었다. 종인은 특별히 동물들에게 넘치는 애정을 쏟아 붓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제 몸보다도 자그마한 것들에게 성향처럼 몹쓸 짓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종인이 특별히 어떠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동물들은 모두 금방 죽거나 도망가 버리기 일쑤였다. 늦게 본 막내아들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했던 부모님은 크게 상심하는 듯했으나, 종인은 마지막으로 집에 있던 강아지가 집을 나간 이후로는 애완동물을 기르지 않았다. 그런 일들을 세훈이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면 새롭게 자해하는 버릇이라도 생겼다던가." "미친 소리 좀 그만해." "손이 만신창이야." 세훈은 온통 밴드가 붙어있는 종인의 손가락을 잡더니 신기한 듯 살폈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에 밴드를 붙인 것뿐 아니라 옅게 멍자욱이 올라오기 시작한 손등 위로 자잘한 생채기들이 여기저기 나있었다. 세훈은 엉망진창으로 상처 난 종인의 손을 흥미로운 듯 바라보았다. 손등이 뜯기고 할퀴어 진 것이 종인이 평소 하던 쌈박질로 얻은 상처가 아니었다. 세훈은 평소와 다른 종인의 상처가 흥미로웠다. 차라리 몸 어딘가가 부러졌거나 거하게 찢어져서 왔다면 세훈은 이렇게까지 종인의 상처에 호기심을 보이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세훈은 최근 종인의 행동패턴이 이전과는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매일같이 꼬박꼬박 학교에 나오는 게 귀찮은 것처럼 굴더니 최근 일주일간은 저보다도 더 일찍 학교에 도착할 때도 있었다. 아마 도경수가 매일같이 새벽 6시 반에 정확히 교문을 통과한다고 말해주었을 때부터였다. 세훈은 종인의 손에 잔뜩 난 자잘한 상처들을 눈으로 훑었다. 어제도 만난 후 바로 까맣게 잊어버린 학생회장에 대해서 물어보더니 도경수를 쫓아 도서실을 갔었다. 김종인과 도서실이라니 소름끼칠 정도로 안 어울렸다. "도경수 얼굴은 왜 그렇게 만들어놨냐." "뭐." "얼굴이 완전 화려하던데. 얼룩덜룩." 세훈은 아침에 도경수의 교실에서 난 작은 소동을 들어 알았다. 매일같이 교실 문을 먼저 열고 들어왔던 도경수가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교실에 도착한 것으로도 부족해서 얼굴에 엉망진창으로 온갖 상처들을 달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세훈은 등굣길에 제 옆을 지나가는 도경수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똑같은 상처를 달고 나타났다면 사내자식끼리 한바탕 쌈박질이라도 했다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도경수가 늘 단정하게 반듯한 옷차림과 청결한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에 얼굴 여기저기 붙은 밴드와 붉고 푸른 생채기들은 시각적으로 더 충격적이게 느껴졌다. "아- 그거." 세훈에게 손을 붙들린 채 무슨 말인지 잠시 생각하던 종인이 이내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예쁘지." "미친놈." "고마워."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며 종인은 어제 마지막으로 봤던 도경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씹질하기 좋은 나이라고 했더니 도경수가 세상에서 저를 제일 더러운 것 보듯이 경멸스럽게 바라보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가버렸다. 그 시선. 하찮은 벌레 보듯이 저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잔상처럼 눈앞에서 떠나지 않아, 종인은 도경수가 자리를 뜬 다음에도 한참이나 소각장에서 혼자 낄낄거렸다. "야, 학생회장 얘기나 좀 해봐." 문득 생각난 듯 종인이 세훈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조금 전 종인의 손을 살피던 호기심은 어디가고 세훈은 입을 꾹 다문 채 종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 왜." "너 곧 죽을 거 같아." "씨발, 뭐래." "안하던 짓 하면 죽는다잖아." 언제부터 제가 하던 짓 안하던 짓 가리면서 살았던가. 종인은 어이가 없었다. "또 뭐가 맘에 안 드는데." "김종인이 언제부터 이렇게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많았어?" 세훈이 아는 종인은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가질 이유가 하등 없었다. 상대방이 기분이나 생각이 어떻든 간에 종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하고 움직였고,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하는 이들은 종인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요새는 뭐가 그렇게 궁금할까." "……." "도경수 때문에?" 최근 종인은 화가 나있었다. 성질 같아선 저를 보고 빙긋 웃는 재수 없는 학생회장의 면상을 흠씬 패주고 싶은데 손이 나가지를 않았다. 준면이 딱히 잘못한 게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대체로 모두와 잘 섞여있는 듯하면서도 정작 아무하고도 섞이지 않은 듯한 도경수가 김준면 앞에서는 아무런 경계 없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뭐 잘못하고 다니는 건 없을까. 겉보기엔 촉망받는 학생으로 성실하고 모범적으로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저렇게 반듯한 놈들은 늘 뒤가 구렸다. "네가 원하는 거 김준면한테서는 하나도 얻어낼 수 없을걸." "설마 그 새끼도 결벽증이야?" 재수없게시리. 말해놓고 생각해봤으나 김준면은 도경수랑 느낌이 달랐다. 바르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지만 결벽증이라고 하기엔 집요한 느낌이 적었고, 학생회장이라 그런지 대체로 모든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듯했다. 도경수는 모두가 친해지고 싶어 하면서도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워한다면, 김준면은 동경해서 다가간다고 해도 개의치 않고 모두 받아줄 것 같은 분위기가 존재했다. 세훈은 뭔가 말할까 입을 열었다가 곧 다시 다물어버렸다. 그제야 종인은 알았다. 지금 세훈은 더 이상 무언가를 말해주기가 싫었다. 심기 불편한 듯 예민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종인은 그나마 저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세훈에 대한 예의로 집요하게 묻는 걸 관두기로 했다. 어차피 김준면이 어떤 놈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종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도경수였다. 도경수를, 어떻게, 굴복시킬, 것인가. 마침 쉬는 시간이 끝나고 3교시가 시작되었다. 공부에는 흥미도 없고 관심도 없는 종인은 턱을 괴고 창문 너머로 운동장을 멀끄러미 바라보았다. 운동장에는 체육시간인 모양인지 도경수네 반이 나와 있었다. 종인은 낯선 얼굴들 사이에서 시선을 헤매며 눈에 익숙한 조그만 몸뚱어리를 찾다가, 불현듯 제가 지나치게 도경수에게 몰입해있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에게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종인은 생소한 자신에게 잠시 몰입했다. 낯설고 기묘한 기분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이상한 기분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종인은 제가 찾는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 없다는 걸 알았다. 항상 무리 안에 섞여있으면서도 따로 홀로 있는 것 마냥 서있던 모양새가 눈에 거슬리기 마련이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를 않았다. 드르륵―. 수업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만 울리는 적막한 교실 안에 의자가 시멘바닥에 긁히는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모두가 소리가 난 쪽을 향해 종인을 보았지만 종인은 신경 쓰지 않은 채 교실을 나섰다. 설마 어제 그 악다구니를 했다고 아파서 학교를 못나왔나, 싶은 생각이 스치듯이 잠깐 들었으나 종인은 곧 그 가능성을 지워버렸다. 아무리 저보다 조막만하다고 해도 그 정도로 비실댈 것 같지는 않았다. 종인은 한 층 아래 있는 경수의 반에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갔다. 기억할 수 있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경수는 체육시간이 싫었다. 굳이 원하지 않게 몸을 써야하는 것도 싫었고 움직일 때마다 먼지를 마시는 것도 싫었으며 무엇보다 잘 알지도 못하는 반 친구들과 부대끼는 것이 가장 질색이었다. 어렸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체육시간에 나갔으나 고등학교 들어와서 경수는 때때로 핑계를 대면서 체육시간을 빠지곤 했다. 얼굴은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덕분에 오늘은 아프다는 핑계로 체육시간에 나가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가느다란 줄이 쳐진 공책 위에 또박또박 글자를 눌러 적으면서 경수는 무심코 혀를 내밀어 터진 입술 위를 더듬었다. 아팠다. 여린 살을 갉아먹는 쓰라린 고통을 타고 김종인이 떠올랐다. 제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지 않았더니 바로 손을 들어 얼굴을 내리쳤다. 미친 새끼. 경수는 작게 중얼거리며 글자를 꾹꾹 눌러썼다. 보통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오고 싶으면 자신이 쳐놓은 경계선에 발을 들이기 전에 톡톡 두들겨보고 조심스럽게 한 발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다가왔다가 경수가 더 이상 반응이 없어 아니다 싶으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 멀어져갔다. 그런데 김종인은 어떠했더라. 종인은 마치 보란 듯이 경계선의 금을 짓밟고 막무가내로 쳐들어 와서는 경수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제 바운더리 안을 마구 휘젓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날뛰는 종인을 볼 때마다 경수는 불안하고 초조해져갔다. 제가 시간을 들여 견고하게 쌓아올린 세상이 종인에 의해 금이 가기 시작했다. 김종인은 도경수가 가지고 있는 세상을 깨고 들어와 제멋대로 부쉈다. 소름끼칠 정도로 무섭고 두려운 경험이었다. 도경수는 김종인이 무서웠다. 그건 보통 사람들이 폭력으로 자신을 대할 때 느껴지는 두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각, 사각, 사각, 날카로운 샤프심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빨라지는 소리에 맞춰 가슴이 쿵, 쿵, 쿵 뛰었다. "혼자 있네." 점점 빨라지던 손길이 뚝, 멈췄다. 불길한 생각에 고개를 들었더니 종인이 서 있었다. 종인을 발견하자마자 단정한 미간사이가 팍 찡그려진다. 좋은 반응이었다. 종인이 바로 앞으로 다가갈 때까지 경수는 제자리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턱을 쥐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하얀 얼굴이 터지고 부어서 엉망이었다. 세훈의 말대로 항상 단정하던 도경수이니 소문이 날 법도 했다. 종인이 마치 제가 만들어놓은 예술품을 감상하듯 경수의 얼굴을 훑고 있을 때였다. "너 나 좋아하냐?" 갑작스러운 경수의 물음에 종인은 멈칫 했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니?" "재수 없는 새끼." "난 니가 욕하면 존나 꼴리더라." "미친놈." "욕도 안하게 생겨서 말야." "꺼져, 씨발아." 욕설을 내뱉는 입술을 보며 종인은 어떻게 할까 고민했다. 때려주기엔 얼굴에 이미 상처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예쁜 얼굴을 더 망가트리는 건 내키지가 않았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기 싫은 거 알고 그러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닐 텐데. 종인은 허리를 굽혀 도경수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예쁜아, 여기서 할까? 스릴 넘치게." "씨발, 이게 진짜!" 거칠게 가슴팍을 미치는 바람에 종인은 잠시 뒤로 물러섰다가 곧 경수의 손목을 붙잡았다. 언제 잡아도 가느다랗고 얇은 게 조금만 힘을 주면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바로 어제도 손목을 붙잡혀 끌려 다닌 탓인지 여직 붉은 자욱이 남아있었다. 쿠당탕-. 도경수가 어제보다 더 심하게 버둥거리는 탓에 의자와 함께 쓰러졌다. 의자가 쓰러지면서 다리가 걸려 책상이 함께 쓰러졌다. 책상 위에 올라와 있던 노트와 필기구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바닥에 손을 짚은 경수는 손을 더듬다가 필통에서 비집고 나온 커터칼을 손에 쥐었다. 드르륵ㅡ. 얇고 날랜 칼 심이 나오는 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종인은 제 앞으로 내밀어진 칼 심을 보고 씨익 웃었다. "와, 이런 짓도 할 줄 아네." "오지 마." 무릎을 굽혀 앉은 종인의 목 가까이 날카로운 칼끝이 섰다. 종인이 무릎걸음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경수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오지 마!" "그어." 종인의 새카만 눈동자가 똑바로 경수의 눈동자에 고정됐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시선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 "지금 못 그으면, 니가 죽을 줄 알아." 말을 끝낸 종인이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지이익- 커터칼을 들고 있는 손끝으로 얇은 피부가 베이는 감각이 전달되었다. 종인의 목덜미에서 베인 상처를 따라 붉은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툭, 종인의 하얀 교복셔츠 깃 위로 새빨간 핏방울이 떨어졌다. 어느새 저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던 경수는 커터칼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종인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고 느낀 순간, 머리채가 휘어 잡혔다. 입술 위로 뜨거운 호흡이 닿고 입술 새를 벌려 물컹한 혀가 침범해 들어와 제멋대로 입안을 휘저었다. 엉망으로 타액이 뒤섞이고 질척이는 소리가 끈적하게 귀를 범했다. 입술을 떼어내었을 때 미처 아물지 못한 입술이 새롭게 터져 피가 났다. 종인은 엄지손가락으로 경수의 입술에 피를 덧발랐다. 새콤한 과육처럼 예쁜 색을 띄던 도톰한 입술이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가는 걸 보며 종인이 경수를 향해 웃었다. "말했지. 죽을 줄 알라고." 종인의 손이 경수의 가느다란 목을 쥐었다. 손목도 얇더니 목덜미조차 기집애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늘었다. 종인은 양손으로 얇은 목을 감싸 쥐고 서서히 조였다. 흐읏…. 하얀 얼굴이 점점 더 하얗게 질려갔다. 꾹 다물린 입술이 숨이 부족한 듯 서서히 벌어졌다. 손가락으로 서서히 기도를 압박해가며 종인은 손가락 끝에 눌리는 살결의 감촉을 음미했다. 잘 닦아놓은 유리알처럼 깨끗한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길게 뻗은 속눈썹이 습기를 머금는 것을 보며 종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힘없이 뻗은 경수의 다리사이를 무릎으로 누르며 종인이 귓가에 속삭였다. "섰네." 차오른 눈물이 눈을 깜빡이는 것에 맞춰 주륵-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왼쪽 턱에 아슬하게 매달려있던 눈물방울이 툭, 손등위로 떨어졌다. 피부가 타들어 갈 듯이 뜨겁다. 목을 죄었던 것처럼 서서히 종인이 손을 풀자 때마침 수업 끝나는 종소리가 울렸다. 복도로 와글와글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의 소리가 아주 먼데서 들리는 것 마냥 아득했다. 종인이 목을 쥔 손을 풀었다. 막혔던 숨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오면서 엉망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흰 뺨을 마구 적시는 눈물이 후두둑 종인의 바지위로 쏟아져 내렸다. 잠시 동안 숨을 고르며 눈물을 쏟던 경수가 다리사이에 자라잡고 앉아있는 종인을 밀치더니 일어서서 휘청거리며 교실을 나갔다. * * * 겉으로 보기에 학교를 장악하는 질서는 선생들의 통제 하에 바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모두 자신의 질서 하에 놓이도록 강압적으로 강요하지 않아도 다들 내심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다. 야생의 정글과 같은 수컷의 무리를 지배하고 있는 건 바로 김종인이라고. 그렇게 학교 안에는 두 가지 질서가 존재했다. 실제로 혈기왕성한 수컷의 무리를 지배하는 질서는 그 안에 속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강한 냄새에 이끌리기 마련인 수컷들은 종인의 주변에 와글와글 모여들었다. 그들은 종인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어울려 제멋대로 움직이는 종인의 뒤를 따랐다. 종인은 특별히 의도하지 않았으나 자신만의 무리를 형성했다. 눈에 보이는 강압적인 통제 외에 사내자식들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힘은 무리를 지을수록 더욱 폭발력을 가졌다. 존재 자체로 파괴적인 종인은 무리를 거느릴 때는 더욱 위협적이었다. 무리 안에 있을 때 종인은 마치 그들과 잘 섞여들고 있는 또래 남자애들처럼 시시덕대었으나, 그들이 하는 얘기라고는 온통 수컷들의 영역싸움 얘기뿐이었다. 어디의 누가 어느 학교를 쳐서 이겼다더라, 머리통을 터트리고 팔다리를 부숴놓았다더라, 누구의 기집애를 빼앗아 갔다더라 하는 정글의 법칙과 같은 이야기들이 중구난방으로 난무했다. "요새 너 얌전해졌다고 소문 쫙 퍼졌던데." 누군가 조심스럽게 하는 말에 종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일주일간 도경수에게만 신경이 팔렸더니 그새를 못 참고 다들 안달이었다. 종인에게 구역을 빼앗겼거나 혹은 위협을 느껴 숨죽이고 있던 놈들이 그새 슬슬 눈치를 보고 날뛰려는 게 눈에 뻔히 보였다. "날뛸 수 있을 때 날뛰던가." 어차피 종인이 지금 가장 관심 있는 건 불특정 다수에게 폭력을 해소하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종인이 성질 꼴리는 대로 쌈박질을 하고 다닌 것도 폭력적인 성향을 풀기 위해서였을 뿐이었고, 타인의 것을 빼앗고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가면서 힘을 과시하려는 생각은 크게 없었다. 물론 제 힘만 믿고 눈에 거슬리게 멋대로 설치고 다니는 새끼들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밟아주고 싶기는 하지만. 마른 입술을 훑으며 종인이 대충 대꾸했을 때였다. "김종인." 소란스러움을 가르고 누군가 종인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의 울림이 사뭇 상냥하면서도 거침이 없어서 모두 이질감을 느꼈다.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준면이 서있었다. 여지없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학생회장이다. 누군가 한숨처럼 작게 말했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눈앞에 서있는 재수 없는 면상이 학생회장이라는 건 종인도 잘 알고 있었다. 제 곁에서 세상에서 가장 거만한 수컷에 되었던 무리들이 무의식중에 그 기가 사그라들었다. 김준면은 강압적이지도 폭력적이지도 않았으나, 웃으며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모두에게 죄책감이 들게 만들었다. "학생회장님이 이런 데까지 무슨 일이야." "대화 좀 할 수 있을까?" 정중한 단어로 예의바르게 건네지는 말투에 종인은 소름이 돋았다. "너 여기서 돌림빵 당하고 싶냐." "종인아." 거침없는 종인의 말에도 준면은 웃음을 잃지 않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다. 누가 들으면 절친한 사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친근한 말투가 종인의 심기를 거슬렀다. "착하게 굴어야지?" 종인과 준면을 바라보던 이들이 동시에 숨을 멈췄다. 여느 싸움에서 쇠파이프로 대가리를 맞았을 때보다 더 강렬한 충격이 모두를 강타했다. 어느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종인이 하,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누군가 저 새끼 돌은 거 아니야? 하고 혼란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 뒤로 처음의 충격이 가신 아이들이 제멋대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릿속에선 이미 준면이 종인에게 개 패듯이 처맞는 장면이 점점 강도를 높여가며 펼쳐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적어도 한 번 이상, 종인이 어떻게 싸우는 지 본적이 있었다. "야, 다 꺼져." 온갖 잔인한 상상들이 모두의 머릿속에 스멀스멀 피어오를 때, 종인이 내뱉은 말은 예상범주에 들어가 있지 않았기에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자리에 앉아있던 종인이 귀찮은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모두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미적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모두 이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을 구경하고 싶은 호기심이 강렬했으나 차마 종인의 말을 어기지는 못했다. 자리를 뜨면서 그들은 다음 날 어떤 소문이 돌지 생각했다. 김종인이 학생회장을 반쯤 죽여 놓을지, 아니면 학생회장이 결국 무질서한 김종인을 잡을 것인지. 종인은 준면의 바로 앞에 섰다. 눈높이가 달라 항상 올려다보면서도 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라 기분이 더럽다. 종인은 저를 향해 상냥하게 웃는 준면을 마주보고 똑같이 웃어주었다. 종인은 상냥하게 미소 지음과 동시에 손을 들어 준면의 조그마한 머리통을 콱 쥐었다. 봐줄 생각 없이 손에 힘을 주고 억지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더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면서도 준면이 우스운 듯 피식 웃었다. 기세등등하네. 악력에 의해 고개를 숙여도 준면은 긴장하거나 수그러들지를 않았다. 재밌는 놈이야. 도경수만 아니었어도 종인은 준면이 꽤 마음에 들었을지도 몰랐다. 제 감은 틀리지 않아, 착하고 번듯하게 사는 것치고 김준면에게서는 어딘지 모르게 뒤틀린 느낌이 났다. "무슨 일이야." "내가 두 번은 없다고 했잖아." "돌려 말하는 거 재수 없으니까 용건만 말해." 조그만 머리통을 쥐었던 손을 풀었더니 준면이 고개를 들어 종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갈색 눈동자가 투명했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눈빛에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이속에 뒤틀린 무언가 있는지도 모르고. "울리는 건 너무하지 않아?" "……." 앞뒤 설명 없이 툭 던지는 말에 종인은 잠시 생각했다가, 끝내 제 앞에서 눈물을 후두득 흘렸던 도경수를 떠올렸다. 그렇게 쳐 울고선 고작 찾아간 게 김준면이라고 생각하니까 또 홧홧하게 열이 오른다. "그래서, 뭐." "……." "넌 뭔데 그렇게 도경수를 싸고돌아?" "……." "둘이 씨발, 떡이라도 쳤냐?" 종인은 벤치에 얌전하게 앉아 줄곧 농구하던 김준면을 보던 도경수를 떠올렸다. 먼지 한 톨 몸에 묻지 않도록 애쓰는 것처럼 절대로 아무에게도 마음을 내어주지 않을 듯 굴면서, 김준면 앞에서 도경수는 경계가 없는 사람처럼 분위기가 바뀌었다. 도경수가 가진 모든 것을 부수어내고 그 파편들에 어떤 생채기를 입혀도 도경수는 제 앞에서는 한풀도 꺾일 줄 몰랐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혈관 속에 피가 부글부글 끓어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아, 아니지." 종인이 말없이 가만히 서있는 준면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도경수 만져보니까 자위 한 번 안했던데." "……." "결벽증인 새끼가 먼저 다리 벌렸을린 없을 테고, 네가 먼저-." 짜악―. 표정의 변화 없이 계속해서 종인의 말을 듣던 준면이 갑작스레 손을 들어 종인의 얼굴을 내리쳤다. 종인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준면은 계속해서 종인의 얼굴을 마구 내리쳤다. 뺨을 휘갈기는 손이 제법 매워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굴을 수차례 때려대더니 준면이 주먹을 쥐고 종인의 가슴팍을 때리기 시작했다. 씨발, 이게 진짜 돌았나! 종인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무지막지하게 가슴팍을 내리치는 준면의 손목을 붙들었다. "와, 씨발. 때렸다 이거지?!" 싸움 한 번 제대로 안 해본 티가 나듯 준면은 순식간에 종인에게 제압당했다. 뺨을 수차례 갈겨댄 건 제법 화끈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주먹이 매운 건 아니어서 종인은 화조차 안 났다. 한손으로 가느다란 손목을 붙들고 다른 손을 치켜든 종인은 준면의 얼굴을 내려치려다가 뚝 멈췄다. 종인의 손에 붙들린 채 거의 매달리듯 서있는데도 준면의 표정은 줄곧 한결같이 웃는 상이었다. 흔들림 없는 그 표정이 마치 나는 네가 나에게 손을 못 댈 줄 알아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바로 얼굴을 가격하지 못한 손이 허공에 멈춰있는 것을 비웃듯 준면이 입을 열었다. "내가, 착하게 굴라고, 했어, 안했어." 뭐야, 이 새끼는? 지금 이 상황도 어이없어 죽겠는데 와중에 저에게 훈계까지 한다. 종인이 미친놈 보듯 준면을 바라보자 준면이 거리낌 없이 종인의 손을 뿌리쳤다. "종인아." 가까이 다가온 준면이 종인의 넥타이를 잡아끌었다. 잡아끄는 손짓에 얼결에 몸을 숙였더니 준면이 귓가에 입을 가져다대었다. 내뱉는 숨이 귓불을 간질였다. "예쁜 건 말야, 예뻐해 줘야 하는 거야." "……." "너처럼 막 다루는 게 아니라."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은밀했다. 응? 어르듯이 말하면서 준면이 툭툭 엉덩이를 쳤다. 여전히 저를 어린아이 다루는 듯한 손길에 종인이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너." "……." "착한 척 하는 거 안 피곤하냐?" 종인은 처음으로 준면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지는 걸 보았다. 희미한 안개가 걷히듯 웃음기가 빠지고 난 후 김준면의 얼굴은 새하얀 피부 탓인지 햇살 아래서도 온기 하나 없이 싸늘해 보였다. 무표정한 얼굴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에 종인은 제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학생회장의 상냥한 얼굴 뒤에 감춰진 또 다른 얼굴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듯 바로 대꾸하지 못하던 준면이 이내 입술 끝을 올려 살짝 웃었다. 그러나 아무리 매끄럽게 미소를 지어도 준면은 전혀 웃고 있지 않는 듯이 보였다. "착한 건 아니지만 척도 아니라서." 준면의 대답에 종인은 피식 웃었다. 우습게도 수긍이 갔다. 모두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성실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있지만 그게 작위적이라 할지라도 김준면이 가진 모습이 아닌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이토록 훌륭하고 완벽하게 이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종인은 다시 완벽하게 미소 짓고 있는 준면을 흥미로운 듯 바라보았다. "갖고 싶지?" "……." "그럼 닥치고 내 말 들어." 종인은 저에게 도경수의 소유를 말하는 준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도경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는 김준면이 종인에게 달콤하게 속삭였다. 너를 도와주고 싶다고. 도경수의 곁에서 그의 상처를 보듬고 어루만져 줄 거라고 생각했던 준면의 제안은 종인도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아마, 도경수도 전혀 생각지 못한 것 아니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종인은 이 희극적인 상황이 미치도록 즐거워졌다. 착한 아이의 가면을 쓴 김준면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것일까! 그제야 흥미가 들은 종인이 준면에게 말해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당근과 채찍, 알지? 이제부턴 좀 살살 다뤄봐." 준면은 당사자인 종인과 경수보다 자신이 지금 이 상황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적이고 결벽증적인 도경수와 동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의 김종인은 상극에 존재했다. 완벽하게 서로 다른 지점을 공유하는 둘이 서로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깨지고 부서지는 건 어쩔 수 없이 도경수 쪽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경수가 단단하고 심지 굳은 것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너무 몰아붙이면 안 돼." "……." "가지기도 전에 망가질라." 먹을 것을 목전에 둔 짐승처럼 새카맣게 빛나는 종인의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맞부딪친 시선이 공모자의 눈빛을 띄었다. "도서실." "……." "지금 가." 은밀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종인을 움직였다. * * * 학교에서 강제하는 교칙들은 끓는 소년들의 혈기를 억지로 붙들어 매지만, 그마저도 수업이 끝나면 소용이 없었다. 특히 점심시간은 유난스럽게 혈기왕성해진 수컷들로 교실이고 복도고 운동장이고 부글부글 끓지 않는 곳이 없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뜨겁고 시끄러운 건 경수를 쉽게 피곤하고 지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경수는 점심시간만 되면 늘 도서실로 도망치곤 했다. 1층 복도 끝 외진 곳에 위치한 도서실은 찾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조용한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였다. 혈기왕성한 소년들은 수업시간에 교과서에 치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피로했기 때문에 모든 쉬는 시간에 도서실은 항상 외면 받는 장소였다. 도서실을 관리하는 학생은 따로 있었으나 경수는 자주 도서실을 찾아 책장 사이에 서서 책을 구경하거나 종종 책 정리를 도와주고는 했다. 보통의 또래들 보다는 책을 좋아하는 편이었으나, 사실 경수가 도서실을 찾는 건 책이 좋아서라는 단순한 이유보다 도서실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었다. 도서실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책상과 책장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고 책장 안에는 규칙에 의해 번호를 붙인 책들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사람이 많지 않은데다 도서실 특유의 적막한 분위기까지 더해 늘 조용한 것도 좋았지만 경수는 특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책들이 마음에 들었다. 나란히 꽂힌 책들을 섬세하게 손끝으로 훑던 경수는 제자리가 아닌 곳에 꽂혀있는 책을 발견했다. E.142.01 책을 꺼내들은 경수는 책등 아래에 적혀있는 번호를 조그맣게 따라 읽으며 눈으로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았다. 집중해서 숫자의 조합을 맞추던 경수는 마침내 바른 자리에 책을 꽂아놓았다. 올바른 자리에 책을 옮기고 나서야 경수는 멍하니 빽빽하게 꽂힌 책들을 바라보았다. 준면이 화단을 부탁한 이후로 한동안은 점심시간에 풀꽃을 돌보느라 오랜만에 찾는 도서실이었다. 숨마저 죽이면 부유하는 먼지소리마저 들릴 듯한 적막함 속에 바르게 잘 정리된 책 사이에 서있으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제야 경수는 제가 지난 일주일간 지나친 감정소모로 피로해져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고작 일주일일 뿐이었는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김종인이 행사하는 정신적인 폭력은 거대했다. 도저히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종인은 첫 만남에서부터 다짜고짜 자신의 뺨을 때려댔다. 경수는 무심코 손을 들어 종인이 때린 왼쪽 뺨을 감싸 쥐었다. 처음 종인이 뺨을 내리쳤던 날카로운 감각이 여직 살아 날뛰었다.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 쥐고 경수는 몸을 움츠렸다. 피부에 남은 타인의 흔적이 소름이 끼친다. 그러고 보니- 흔적이 남은 것은 왼쪽 뺨만이 아니었다. 경수는 손끝으로 터진 상처가 아물기 시작한 입술을 만져보았다. 이제 막 아물기 시작한 상처 위로 새살이 돋고 있었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경수는 붉고 푸른 멍울이 올라온 제 얼굴이 훤히 보였다. 악다구니 하는 동안 종인이 무지막지하게 쥐었던 손목과 목덜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경수의 몸은 종인의 손길에 온통 붉은 흔적이 난무했다. 종인과 맞부딪친 첫 만남 이후로 생채기가 생기지 않은 날이 없었다. 바로 곁에 있지 않아도 경수는 제 몸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 상처들로 종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사소한 것으로 시작된 기억은 점점 증식하며 머릿속을 갉아 먹듯 종인의 생각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경수는 진저리를 치며 상처를 더듬던 손을 재빨리 내렸다. 빨리, 다른 것으로 생각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경수는 필사적으로 종인의 생각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준면을 떠올렸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첫 날, 경수는 처음 준면을 보았다. 입학식이 진행되는 동안 교단 위에서 선생님들과 함께 나란히 서있던 준면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면서도 내내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다. 경수에게 준면은 가장 이상적인 존재였다. 도경수는 김준면처럼 되고 싶었다. 생전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본 적 없던 경수는 처음으로 먼저 다가간 사람이 준면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였으나 준면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를 좋아했고 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준면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관심을 나누어주었고 어느 누구에게 부족함 없이 친절하게 대했다. 때문에 제가 처음 준면의 곁을 맴돌 때만 해도 김준면에게 도경수는 저를 따르고 좋아하는 수많은 후배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 준면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경수에게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경수는 동경하는 선배의 관심을 받게 된 게 내심 기뻤다. 그리고 새 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준면이 경수를 불렀다. 경수는 그때 본관 뒤에 허물어져 가는 자그마한 화단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학교에서 없애려고 하는데, 그럼 학교가 너무 삭막할 거 같지 않아?" 준면이 하는 얘기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으나 경수는 그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돌봐주면 기쁠 거 같아." 저에게 부탁하며 웃는 준면의 얼굴이 싱그러웠다. 준면의 말에 경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경수는 어렸을 때 흔히 집에서 기르던 애완동물은 물론이거니와 손에 흙을 묻혀가며 조그마한 화분 하나 가꿔본 적 없었다. 그러나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잘 할 거 같은데, 하고 말하는 준면의 기대를 저버리긴 싫었다. 준면은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도와주었으면 도와주었지 부탁을 할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준면이 저에게 처음 부탁한 일이었다. 경수는 웃으면서 그러마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화단을 가꾸는 건 지금까지 꽤 좋은 성과를 보였다. 며칠 전, 흙을 뚫고 푸릇하게 올라오던 조그마한 잎사귀를 떠올리며 경수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손에 흙을 묻히는 일이 제법 성가시고 아직까지도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으나 자그마한 새싹이 빛을 봤을 땐 그런 생각조차 사그라들었다. 부탁하길 잘 했다. 준면의 칭찬도 한 몫 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온갖 활자들이 나열된 책등을 쭉- 훑다가 경수는 원예에 관한 책에서 손을 멈추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익숙하지 않은 게 많았다. 관련 책들을 모조리 꺼내다보니 책장 한편이 다 비었다. 아, 이 책도. 욕심껏 책 한권을 더 꺼내던 경수는 비어버린 책장 건너편에 종인이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투둑. 안고 있던 책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모두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종인을 발견해 경수가 당황한 사이 책이 떨어지는 소리를 따라 종인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경수는 무심코 숨을 들이켰다. 경수를 발견한 종인이 책장 너머로 손을 뻗었다. 책장 때문에 바로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경수는 당황해서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낡은 나무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진 책들이 발에 채였다. 무심코 무릎을 굽히고 앉아 급하게 책을 주워 들던 경수는 불현듯 책을 주워드는 것보다 이곳을 벗어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았다." "……." 종인은 경수가 미처 다 줍지 못한 책을 밟고 섰다. 적막한 탓에 종인의 목소리조차 나지막했다. 새카만 눈동자가 저를 집어 삼킬 듯 일렁인다. "발 치워." 아무리 낡고 모서리가 마모되었다 하더라도 하얀 표지의 책이었다. 단호한 경수의 말에 종인이 피식 웃더니 곧 별다른 말없이 발을 치워주었다. "읏." 얌전하게 발을 치워준 것도 잠시 종인은 쭈그리고 앉은 경수를 억지로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힘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다는 걸 깨달으면서도 매번 분해서 참을 수가 없다. 양쪽에는 모두 책장이 서있고 눈앞에는 종인이 도사리고 있었다. 경수는 그제 제가 막다른 곳에 내몰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책을 줍는 대신 빨리 도서실을 벗어날 걸 하는 후회가 들었으나 상황은 이미 끝난 후였다. 종인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오는 것에 맞춰 경수는 뒷걸음질 쳤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이 등이 벽에 부딪치게 되었을 때야 경수는 종인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또, 뭐." 말하던 경수는 종인이 손을 뻗는 것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말았다. 종인의 손이 끝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 깃 위로 경수의 목을 감싸 쥐었다. 문득 목을 감싼 손바닥의 감촉이 생각보다 부드러워서, 또 따뜻해서 놀라고 말았다. 종인은 양손으로 목을 감싸 쥔 채 조르는 대신 붉게 자욱이 난 부분을 살살 문질러주었다. 언제나 예상을 빗나가는 종인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은 더욱 경수의 예상에 없는 행동이었다. 따뜻한 피부가 부드럽게 마찰되면서 묘한 감각을 일으켰다. 미처 뿌리치지 못하고 서있던 경수의 눈에 그제야 종인의 목에 가로로 길게 난 상처가 보였다. 상처. 낯설고 두려운 단어에 경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누군가 자신을 건들이지 말아 주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에게 어떤 흔적을 남긴 적이 없었다. 경수는 무심코 손을 들어 종인의 목에 난 상처 위를 더듬었다. 기다랗게 살덩이가 베인 자욱 위로 돋은 새살이 손끝에 닿았다. 떨리는 손끝으로 종인의 상처를 더듬던 경수가 흠칫하며 손을 떼었을 때였다. 얌전히 제 목을 쥐고 있던 종인이 고개를 숙여 코끝에 더운 숨이 와 닿았다. 제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감싼 것보다는 강하게 그러나 조르는 것보다는 약하게 목을 쥔 채 종인이 도톰한 붉은 입술에 입을 맞췄다. 며칠 동안 종인에게 시달리면서 너덜해진 입술 위로 따뜻한 날숨이 닿았다가, 발간 혀가 날름 터진 상처 위를 핥았다. 억지로 입술을 벌리고 키스해올 것이라고 예상했던 경수는 허공에 멎은 손으로 종인을 밀어내려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따뜻한 숨이 터진 입술 위의 상처를 끈질기게 핥다가 멍과 상처로 얼룩진 얼굴 위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마치 짐승이 상처를 핥아주듯이 작은 생채기 하나에도 종인의 혀가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따뜻한 숨이 아픈 곳을 어루만지는 생경한 감각에 취하고 말았다. 너 나 좋아하냐? 멍해진 머릿속으로 목을 옥죄는 종인의 손길을 따라 무심코 던졌던 물음이 떠올랐다. 그건 대체 왜 물었을까.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할 질문이었으나, 제 물음에 종인은 일초의 망설임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재수 없는 새끼. 그제야 잠시 잊고 있던 종인에 대한 적의가 다시금 불타올랐다. 사람들은 모두 곁에 다가오면 무언가를 강요하려했다.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친밀함의 표시로 상대에게 자신이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종인은 노골적으로 강요하지 않아도 자신의 룰에 의해 강제적으로 상대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 마." 그제야 경수는 가까스로 종인을 밀쳐냈다. 종인이 밀려난 사이 빠져나가려고 했던 경수는 바로 종인에게 머리채를 붙잡혔다. 악!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 얼결에 소리를 지르고 도서실이란 걸 바로 깨달은 경수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 미친 새끼가 또 시작이야! 머리채를 붙잡혀 억지로 종인의 앞에 세워진 경수는 눈물이 날 것 같은걸 애써 참으며 종인을 노려보았다. 종인과는 내내 이 패턴이었다. 분노로 거칠어지는 숨을 참으려 애쓰며 경수는 종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악다구니를 쓰던 경수는 뻑- 소리에 버둥거리던 것을 멈췄다. 악다구니를 쓰던 와중에 종인의 턱을 가격했다. 제대로 주먹을 맞은 종인이 잠시 멈췄다가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아파." 턱을 매만지며 종인이 재미있다는 듯 경수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실 웃음을 흘리는 게 정상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이렇게 격렬하게 거부하는데도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걸 보면 이 새낀 미친놈이 분명했다. 제 곁에서 마구 날뛰는 종인을 볼 때마다 경수는 두려워서 혼절할 지경이었다. 더 이상 상종하지 않는 게 시간을 아끼는 길이라고 생각한 경수는 종인을 지나칠 때였다. "멈춰." 저를 노리는 맹수에게 잡혀 먹히기 직전인데 멈추란다고 멈춰서는 멍청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수는 미처 책장 사이를 다 빠져나가기도 전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하, 도대체. 이 미친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경수는 조그맣게 뇌까렸다. "가지 마." 애초에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있기 때문에 종인은 말보다는 행동하는 타입이었다. 그런 종인이 가지 말라고 말했다. 종인의 낯선 말이 힘을 가지고 경수를 옭아맸다. 입술을 몇 번 들썩이던 경수는 손끝이 하얘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왜." "……." "안가면, 어쩔 건데?" 몸을 돌려세운 경수가 종인에게 물었다. 책상도 책장도 모두 나란히 선 도서실 속에 있는 도경수는 소름끼칠 정도로 잘 어울렸다. 그리고 가장 이질적인 존재는 바로 자신이었다. 종인은 제가 만들어놓은 도경수를 바라보았다. 늘 단정하던 옷차림을 찾을 수 없게 온통 흐트러진 데다 잘 닦아놓은 말끔한 얼굴조차 붉고 푸른 상처들로 얼룩져 있었다. 그럼에도 도경수는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맛이 있었다. "강간 칠거야." 걸러지지 않은 종인의 말에 경수가 질린 얼굴을 했다. 도경수가 희게 질릴 때마다 좋아서 돌아버릴 것 같다. 아무의 손을 타지 않은 도경수를 제가 가장 처음으로 범하고 싶다. 종인은 다시 벌어진 거리 사이를 좁혀 경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눈앞의 도경수는 분노인지 수치인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종인의 손이 경수의 동그란 어깨를 붙들었다. "니 다리사이 벌리고, 들어갈래." 성욕과 식욕은 비례한다더니, 마음 같아선 눈앞에 있는 도경수를 오독오독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다 씹어 먹고 싶다. 종인의 말에 희게 질린 경수가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물었지." "……." "한 번 하면, 넌 뭘 해줄 건데?" 결벽적인 성격 때문에 자위 한 번 해본 적 없었지만 경수는 성적인 부분에 지나치게 담백할 뿐 순진한 건 아니었다. 경수는 종인이 제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충분히 잘 알았다. 그러나 경수는 종인과 섹스를 한다고 해서 무언가 바뀔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종인과의 관계부터 자신의 성향까지, 종인이 저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멍청이는 섹스라도 하면 제 위에 군림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이라도 하는 걸까. 명백한 비웃음을 띄우며 경수는 종인에게 말했다.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네 영향력이 나한테도 미칠 거라는 착각 따윈 꿈 깨. * * * "아무것도 아니다, 라." 경수의 말을 따라하는 종인의 얼굴에서 희미하게 표정이 사라졌다, 다시 웃음을 띠었다. "그럼, 시험해 볼까?" "뭐-, 읏." 경수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종인이 동그란 작은 어깨를 붙잡고 다시 벽으로 밀어붙였다. 차가운 벽에 등이 턱, 하고 부딪쳤다. 아파, 이 새끼야! 안 그래도 종인 때문에 하루라도 성할 날이 없는 몸이었다. 손을 들어 종인의 어깨를 밀치며 격렬하게 밀어내려고 할 때였다. 종인의 손이 거침없이 바지춤을 꽉 쥐더니 비비기 시작했다. 얇은 옷가지와 함께 페니스를 주무르는 손길에 발끝부터 소름과 함께 생소한 감각이 단번에 치솟았다. 발가락 끝을 잔뜩 오므리며 얼결에 허리를 굽혔더니 종인이 부풀기 시작한 것을 쥐고 흔들었다. 아, 흣…! 발작적으로 터지는 신음을 참지 못한 경수가 종인이게 매달린 채 필사적으로 손을 틀어막았다. 와중에도 지는 건 죽어도 싫은 도경수를 비웃으며, 종인은 다른 한 손으로 경수의 턱을 쥐고 엄지로 입술사이를 억지로 비비고 들어갔다. "소리." "윽." "예쁜 소리 내야지. 응?" 손가락이 과일의 살점처럼 통통한 입술을 톡톡 건드리더니 떨어져나갔다. 살짝 쥐고 흔든 것뿐인데 타인의 손길은커녕 자신의 손길조차 타본 적이 없는 몸은 종인의 생각보다 더 빠르고 쉽게 흥분했다. 도경수는 순진하지 않았지만 확실히 도경수의 몸은 순진했다. 어느 정도 페니스가 부풀어 오르니 손에 느껴지는 얇은 교복바지의 감촉이 거추장스러웠다. 종인이 교복바지의 버클을 풀어내려고 했더니 도경수가 필사적으로 손을 붙들고 도리질 쳤다. 씨발, 앙큼하게 고개도 저을 줄 알고 귀여운 거 봐라. 종인의 뜨거운 혀가 마른 입술을 훑고 지나갔다. 거부하는 것과는 반대로 도경수의 다리사이는 흥분으로 벌벌 떨리고 있었다. 제지하는 손목을 힘으로 붙들고 바지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얇은 속옷위로 잔뜩 부풀은 페니스가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울며불며 애원하는 것도 안 봐주고 당장이라도 박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흥분해놓고선, 순진한 척 할 거야?" 서운하게시리. 속옷 위로 부풀어 오른 페니스를 쥐었더니 좀 더 직접적인 감촉에 기댄 몸이 바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솔직한 몸이었다. 귓가에 속삭이던 종인은 귓불에 난 점 위에 키스하다가 이로 살짝 살점을 씹었다. 단정하게 잘린 머리카락 끝에 배인 습기가 코끝에 닿았다. 희미한 땀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귀도 쪼그맣네. 입안에 넣고 씹으면 한입에 다 들어갈 것 같다. 귓불에서 턱 언저리로, 다시 목덜미로 이어진 점을 따라 키스하면서 종인은 잔뜩 부푼 페니스를 쥐던 손을 빼냈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무심코 다리사이를 오므리는 것도 잠시, 종인은 무방비하게 기대있는 경수의 몸을 끌어안고 다리를 얽었다. 허벅지 사이로 틈도 없이 얽힌 페니스가 압박을 받아 손으로 만져주던 것과는 다른 쾌감이 뇌리를 쳤다. "하악!" 잔뜩 부풀은 페니스가 압박당한 상태에서 허벅지 사이로 은근히 비벼지기 시작하자 경수는 처음 느끼는 쾌감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어떻게든 종인을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희미하게 사라지면서, 온몸을 지배하는 흥분에 손끝까지 벌벌 떨려왔다. 혼자 버티고 서있을 힘이 없어 종인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흔들리던 경수는 어떻게든 소리를 참으려 종인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얇은 교복 셔츠가 구겨지면서 질척하게 타액으로 젖어들어 갔다. 재차 어깨를 깨물면서도 점점 강도를 높여가는 흥분을 참지 못하겠는 듯, 단정한 손톱 끝이 바르작거리면서 등을 긁어댔다. 치솟는 쾌감을 못 참고 몸을 기대서 제가 휘두르는 대로 뒤흔들리는 모습이 좋아서 종인은 당장이라도 갈 것 같았다. 도경수가 더 참지 못하고 어깨를 짓깨물어 주었으면. 등을 더 할퀴어 주었으면. 종인은 갈증이 나 다급하게 경수의 머리채를 쥐고 입을 맞췄다. 보드라운 머릿결이 손가락 사이에 얽혀들었다. 급박하게 열린 입술 새로 혀를 집어넣고 말캉한 혀를 잡아챘다. 엉망으로 혀가 뒤엉키면서 타액이 넘쳐흘렀다. 아무리 호흡을 섞고 섞어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아 애가 탔다. 아쉬운 마음에 입술을 떼었더니 어느새 사정한 경수가 탈진한 듯 축 늘어졌다. 흐, 흐읏….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주저앉은 도경수가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문댔다. 조금 전의 여운으로 하얀 뺨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무릎을 굽혀 앉은 종인이 경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흥분으로 물기가 배어있는 눈동자까지 깨끗했다. 투명한 눈동자가 참을 수 없어 얼굴을 감싸 쥐고 물기어린 눈가를 핥았다. 혀끝으로 투명한 눈알까지 모두 핥고 싶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톡 치는 달아오른 뺨의 감촉이 말랑했다. 조금 전까지 흥분으로 그렇게 벌벌 떨고서도 저를 노려보는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래서 좋은 거지만. "아닌 거 같은데." 빈정거리는 종인의 말에 벌개진 얼굴이 분노와 수치심으로 더 달아올랐다. 꽉 쥔 주먹이 그대로 얼굴에 한 방 먹일 거 같아 다음 반응을 기대하고 있을 때였다. "저기, 이제 문 닫아야 하는데…." 책장 끝에서 도서실을 관리하는 학생이 머뭇거리면서 말을 걸었다. 어수룩하게 생긴 학생은 둘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모양인지 말끝을 흐리면서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는 경수를 눈으로 훑었다. 그제야 당황과 수치심에 옷을 추려 입는 경수를 몸으로 슬쩍 가리며 종인이 웃었다. "알았어." 상냥하게 웃었지만 당장 꺼지라는 듯 살기등등하게 느껴지는 눈빛에 사서가 화들짝 놀라는 꼴이 볼만했다. 무심한 도경수는 애써 몸을 가려준 성의도 무시한 채 옷을 추스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미처 붙잡기도 전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관리 학생에게 다가가더니 어깨를 툭 치면서 미안하다고 작게 말을 건넸다. 사서와 함께 자연스럽게 자리를 뜨는 도경수를 보며 종인은 쯧, 짧게 혀를 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틈도 없이 닿았던 감촉이 지독하리만치 피부에 새겨졌다. 빠르게 도서실을 벗어난 경수는 급하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앞에 서서 수도꼭지를 돌리자마자 콸콸 쏟아지는 물을 양손으로 받았다. 얼굴 가득 찬물을 끼얹으니 그나마 열기가 식히는 것 같다. 식은땀에 젖은 얼굴을 씻어내다가 종인이 귓가에 끈덕지게 키스하던 것이 생각났다. 물기 맺힌 손끝으로 귓불과 목덜미를 씻었다. 씻어도 씻어도 사라지지 않은 감각이 선명했다. 아래는 어떡하지. 다행히 사정액이 바지까지 튀지는 않았으나 여직까지 속옷이 질척하게 젖어있는 것 같다. 거울을 보면서 경수는 초조하게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흐트러진 셔츠를 다시 입고 단추를 끝까지 꽉 채우고 넥타이도 다시 매었다. 교복 바지에도 먼지가 묻었을까 싶어 몇 번이고 털어내었다. 겉보기엔 완벽했으나 이전처럼 어딘지 마음에 드는 차림새는 아니었다. 몸을 끌어안고 달아오른 피부가 비벼졌다. 몸 안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낯선 감각들이 세포를 일깨우듯 전신을 뒤흔들었다. 무심코 조금 전에 있던 일을 되새기면서 경수는 생경한 감각들이 온몸을 뒤덮었던 걸 떠올렸다. 피부위에 상처가 난 것처럼 자국이 남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 크고 지독할 정도로 선명한 흔적이 몸에 새겨진 기분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오른다. 생각의 틈을 비집고 점심시간이 끝나는 예비종이 울렸다. 경수는 어쩔 수 없이 종소리에 쫓기듯 화장실을 나왔다. 김종인을 만난 이후로 끊임없이 견고하게 지켜오던 세계가 무너져 내린다. 기분이 불쾌해서 참을 수가 없다. "아, 선배." 교실로 돌아가던 경수는 복도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준면을 발견하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미소를 지은 준면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에 답했다. "도서실에 있다 와?" "네." 질문을 던지던 준면의 시선이 천천히 경수의 몰골을 훑었다. 그 시선에 경수는 저도 모르게 아직 물기가 맺혀있는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열심히 씻어내었는데도 흔적이 남아있을까 두려웠다. 게다가 언제나 완벽한 선배 앞에서는 흐트러져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실례였다. 한 번도 신경 썼던 적이 없는 일을 신경 쓰이게 만들다니, 새삼스레 김종인에게 짜증이 치솟는다. "별 일은 없고?" "네, 별 일 없어요." "그렇구나." 경수의 대답에 수긍하며 준면이 웃었다. "수업 늦겠다. 들어가 봐야지." 툭툭 어깨를 두들기는 손길에 경수가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등을 돌려 사라졌다. 준면은 복도를 돌아 사라지는 경수의 조그만 등을 보다가 도서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걸으며 준면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던 준면은 복도에 서있는 종인을 발견했다. 제대로 찾았네. 계단 위에 서있는 준면을 발견한 종인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종인과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잔뜩 흐트러진 옷매무새가 보인다. 김종인과 단정한 옷차림은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어디서 한바탕 구르다 온 것처럼 구겨진 옷차림을 하고 다니진 않았다. 턱을 매만지며 서있는 꼴을 보아하니 얼굴도 한 대 맞은 듯했다. 도경수가 체구는 쪼그매도 할일은 야무지게 잘 하는 것처럼 주먹도 꽤나 단단한 모양이었다. "제대로 준 거 맞아?" "뭘." "당근." "지랄." 대답하는 꼬라지를 보아하니 생각대로 잘 안된 모양이었다. 종인의 어깨를 위로하듯 어루만지며 준면이 말했다. "둘 다 한심해." 안타까운 듯 말하는 목소리가 재수 없어 속이 확 뒤틀린다. 김준면은 저에게 도경수의 소유를 말했으나, 애초에 김종인이 도경수에게 가진 생각은 부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얌전하게 예뻐하는 건 성격에 맞지 않았다. 종인은 그저, 도경수가 끝내 망가지더라도 제 방식대로 뒤흔들고 싶었다. 생각보다 더 순수하게 아무의 손을 타지 않은 도경수를 가장 먼저 범하고 싶었다. 아무리 엉망으로 뒤흔들어도 결국엔 지지 않겠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가는 도경수를 끝내는 제 밑에서 울면서 기게 만들고 싶었다. 머릿속으로 온통 도경수가 부글부글 들끓는다. "속 긁지 말고 꺼져." "내말 잘 들으라니까." 준면이 뺨을 가볍게 툭툭 쳤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고 변칙적으로 움직이는 종인이지만, 그런 종인에게도 자신만의 룰이 있어 최소한 못된 짓 않고 얌전히 있는 아이들은 건들지 않았다. 준면은 그런 종인의 룰을 높이 샀다. 김종인은 미쳐도 자신이 설정한 틀 안에서 미친놈이었다. 그렇기에 사실 김종인은 도경수를 건드리지 않는 게 옳았다. "후회한다, 너." 준면은 종인이 누군가에게 집착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도경수는 모든 상황에서 김종인에게 예외였다. 뺨을 두들기는 준면의 손길이 거슬리는 듯 종인이 손을 쳐내었다. "그럼, 이제- 교실로 돌아가야지?" 웃는 얼굴처럼 부드럽게 말했으나 마치 행동을 강요하듯 힘이 실려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쾌한 표정을 드러낸 얼굴에도 준면은 친근하고 상냥하게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 또 봐-. 작게 인사말을 속삭인 준면이 등을 돌려 사라졌다. 견고하게 착한 아이의 가면을 쓴 얼굴이 자꾸만 심기를 거슬러 기분이 언짢아진다. * * * 종례까지 모두 끝나고 난 후 교실은 방과 후에 대한 기대로 들끓었다. 왁자지껄하게 가방을 챙기며 오늘은 또 무슨 위험천만한 일을 저지를지 생각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종인은 가장 무심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최근 종인의 관심사는 온통 도경수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세훈조차 도경수에 대해서는 한정적으로 알았기에 종인은 학교 밖에서 도경수가 무얼 하고 다니는지 전혀 몰랐다. 교실에 쳐들어갈까. 불과 몇 시간 전에 닿았던 자그마한 몸뚱어리가 잊히지를 않는다. "너 요즘 얌전하네." 생각에 빠져있는 종인에게 세훈이 불쑥 말했다. "내가?" "소문 다 났던데. 김종인이 개과천선해서 이 바닥 떴다고." 가방을 챙기면서 대수롭지 않은 듯 얘기했으나 세훈이 하는 말이니 틀린 소문은 아닐 게 분명했다. "별 미친 소문도 다." 세훈은 어처구니없는 듯 웃어버리는 종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종인처럼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건 아니었으나 세훈은 종인이 속한 세계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았다. 종인이 속한 세계는 가장 본능적이고 즉발적인 반응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존재 자체로 영향력이 있는 종인이었기에 조금만 얼굴을 안 비쳐도 온갖 소문이 망상을 입고 풍선처럼 부풀려져 떠돌아다녔다. 최근 그 바닥에 있던 여자애들은 종인에게 여자가 생긴 게 아닌지 궁금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여자애들 뿐 아니었다. 단단히 그들 위에 군림하고 있던 종인이 안보이기 시작하니 저들끼리 물밑에서 구역을 나누고 패를 가르던 것이 수면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바닥에서 종인의 자리를 탐내는 수컷들은 차고 넘쳤다. 그들은 아직은 비어있는 종인의 자리를 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너 도경수한테 관심이 지나친 거 같지 않냐." "……." "사귀게?" 세훈의 물음에 종인은 생소한 말을 들은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붙잡은 것처럼 수많은 년, 놈들과 떡을 치면서도 종인은 사귀어야 한다거나 혹은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종인은 자신을 누군가에게 이해시켜야 하는 것도 싫었지만 누군가 자신을 받아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구속해보려는 생각 자체가 희박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속박당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만히 생각하던 종인이 피식 웃었다. "미쳤냐?" "……." "왜."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문 세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종인이 물었다. "소문이 안 좋은데." 세훈이 불편한 듯 종인에게 말했다. 편집증적으로 정보를 모아대는 세훈은 누군가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질 않았다. 모든 걸 알아도 관조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조심해." 별 일 아니라는 듯 종인의 어깨를 툭 치며 세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종인은 도경수를 가지고 싶으냐고 묻는 준면도 사귈 거냐고 묻는 세훈도 모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경수가 가진 분위기가 온통 제 신경을 잡아끄는 것은 인정했다. 그러나 종인은 단지 도경수가 가지고 있는 질서를 흐트러트리고 싶을 뿐이었다.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적의를 불태우며 저를 바라보던 얼굴이 눈앞에 선명했다.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도경수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 말에 새삼스레 다시 열이 오른다. 그럼 그게 아니게 만들면 되지. 아무에게도 정복당하지 않은 도경수를 정복하고 싶어서 몸이 단다. * * * 여러 학교가 몰려있는 지역의 하굣길은 늘 온갖 교복을 입은 무리들로 혼란스러웠다. 정류장 앞 패스트 푸드점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종인은 유리창 너머로 개미떼처럼 모여 있는 무리들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빳빳한 하얀 칼라에 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짙은 남색 자켓을 입은 아이들은 종인이 다니는 S고의 학생들이었다. 그 틈새에 무리지어 있는 회색의 하이넥 자켓을 입은 아이들은 M고의 학생들로 종인이 다니는 S고와는 가장 오랫동안 앙숙이었다. 버스 정류장은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두 학교의 학생들이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데 엉켜 있으면서도 묘하게 뒤섞이지 않았다. 그들 사이로 간간이 근처 예고의 여학생들이 치마를 팔랑거리며 섞여들었다. 한 덩어리를 이룬 무리들은 버스가 올 때마다 한 움큼씩 사라졌다가 또 그만큼 채워졌다. 지긋지긋 할 정도로 끊임없는 하교 행렬이었다. 여섯 번째 버스가 학생들을 실어 나를 즈음, 종인의 앞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트레이가 놓였다. "처먹어." 주문한 세트를 받아온 세훈이 귀찮은 듯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피곤한 듯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세훈을 힐끗 보았다가, 종인은 빨대를 입에 물고 다시 창밖의 무리들로 시선을 옮겼다. 무질서하게 제멋대로 서있던 무리가 갑작스레 한곳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톡- 쏘는 탄산이 목구멍을 긁으며 넘어갈 때 종인은 모두의 시선 끝에 서있는 준면을 보았다. 이제 막 학교를 나온 모양인 준면은 저에게 건네지는 인사를 줄곧 웃는 낯으로 받아주고 있었다. "재수 없는 새끼." 이제 막 나와서 따끈한 감자튀김을 씹으며 종인은 말을 내뱉었다. 종인이 보기에 준면은 저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늘 한결같은 거리를 유지했다. 그 거리는 모두에게 공평해서 어느 누구에게든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았다. 그런 김준면과 다른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건 종인이 아는 한에서는 도경수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리고 도경수도 김준면 앞에서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거리감을 유지했다. 서로에게 욕망을 가져본 적도 없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관계라니, 소름끼칠 정도로 불쾌하기 짝이 없다. "무슨 생각일까." 종인의 혼잣말에 세훈이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종인은 최근 준면이 제게 하는 말과 행동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를 착하다고 하면서 어린애 취급 하는 것부터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뒤로도 뺨 싸대기를 갈겨대질 않나, 착하게 굴라고 강요하지를 않나, 무엇하나 정상적인 행동이 없어 보였다. 그 중 가장 예상에 없는 행동은 도경수에 관한 것이었지만. 무엇이든 다 안다는 듯 이래라 저래라 제 행동에 대해 언질을 놓으며 살살 속을 긁는 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뭐 잘못하고 다니는 거 없나." "없어." 겉으로 똑 부러지고 반듯할수록 뒤로는 호박씨 까는 놈들도 많건만, 종인의 중얼거림에 세훈이 단박에 잘라 말한다. 세훈이 말한 거라 틀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내가 알아봐서 알아." "……." "너무 완벽해서, 이상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어." 종인에게 꿈 깨라는 듯 세훈이 못을 박았다. 세훈의 말에 종인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가능해?" "김준면 보면 불가능하지도 않지." "저 새끼 저거 가면 쓴 거야." 말하면서 종인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종인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착한아이의 가면을 벗었을 때 드러난 김준면의 얼굴을. 핏기조차 없는 하얀 얼굴이 햇살을 받고 있었음에도 서늘해서 웃고 있어도 웃는 것 같아 보이질 않았다. 그때 종인은 직감했다. 이게 진짜 김준면의 얼굴이라고. "네 말이 맞아. 맞는데-." "……." "김준면이 착한 척 하기로 했는데 그 외 헛짓거리 따윌 할 거 같아?" "뭐?" "말 그대로 착한아이의 가면을 쓰고 있는데 다른 짓을 왜 해." 자신이 쓴 가면에 위배되는 행동이잖아. 덧붙이는 세훈의 말에 종인이 한 대 맞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다가 허, 하고 웃음을 흘렸다. 진짜 미친 새끼네. 종인은 그제야 착한 건 아니지만 척도 아니라고 준면이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착한 건 아니지만 완벽하게 착한 아이로 살고 있다 이거지? "그러니까 괜히 건드리지 마." 신경을 거스르는 세훈의 목소리에 종인이 잘게 미간을 찌푸렸다. 종인이 아는 한 세훈은 자신이 아는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모든 걸 알아도 사건에 개입하기보다 관조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세훈이 준면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건드리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너 학생회장하고 무슨 사이냐?" 종인의 물음에 세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헛소리 말고." "……." "김준면도 보통은 아니란 소리야." 세훈의 충고에 종인은 빨대를 휘저으며 콜라에 담긴 얼음을 휘적거렸다. 아직 마모되지 않은 얼음덩어리들이 부딪치면서 달그락 소리를 내었다. 원하는 이야기를 하나도 듣지 못해서 종인은 불만스러웠다. 세훈의 말에도 불구하고 준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만은 더욱 커졌다. "야. 너 정신 차려." 짜증스럽게 콜라를 들이키는 종인을 향해 세훈이 말했다. "너 요새 진짜―." "김종인 아냐?" 세훈이 무언가 말하려고 할 때 누군가 테이블을 톡톡 두들겼다. 입안에 얼음을 넣고 와그작 깨물던 종인은 저를 부른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회색 하이넥 자켓이 눈에 띄었다. "개과천선 했다더니, 여기서 뭐해-." "……." "맨날 얼굴 보이더니 요새는 뒤꽁무니도 보이질 않고."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근한 사이인양 말을 건넨 이가 종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디서 미친 소문을 듣고 와서 개소리야." 종인이 밝게 웃으며 옆자리에 앉은 상대의 어깨를 툭 쳤다. 서로 웃으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사이인 듯 굴고 있으나, 둘 사이에는 여차하면 단번에 베어버릴 듯 잔뜩 벼린 날이 서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퉁퉁 불은 어린아이마냥 있던 종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너 요새 이거 생겼냐?" 종인은 제 앞에서 흔들리는 새끼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내가?" 종인은 저에게 말을 건네는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언제 봤나 했더니 아직도 이마에 흐릿하게 남은 상처에 기억이 났다. 불과 몇 달 전, 제 손으로 찢어놓은 상처를 잊을 리가 없었다. "니 여친은 잘 지내냐?" "……." "너 좆이 그렇게 시원찮다며?" 발랑 까진 기집애들이 들이대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반했다고 치대는 걸 딱히 거부한 적도 없고 해서 한 번 잤더니 그게 이 새끼 여친이었다. 거기까지도 알 바 아니건만 떡치고 난 다음에 사귀던 놈이랑 헤어지겠다고 울며불며 매달리더니 쌍으로 찾아와서 눈앞에서 별 지랄을 다 떨었던 기억이 있다. 이 새끼랑 구멍동서 될 줄 알았으면 재수 털려서 애초에 떡도 안쳤을 텐데. "네 거나 단도리 잘 해." 종인은 회색 교복바지 위로 꽈악-, 페니스를 쥐었다 놓았다. 시원찮을만하네. 덧붙이는 종인의 말에 표정을 따라 이마의 흉터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여전하네, 김종인." 애써 웃으려고 하지만 이미 희미하게 굳은 표정이 볼만했다. 슬슬 상대해주는 것도 지루해 조금 더 말을 씨부리면 얼굴을 갈아버릴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근데 너, 그럼 도경수하고는 아무 사이도 아니다?" "……." "그럼 내가 재미 좀 보고." 할 말을 다 끝낸 듯 어깨를 툭툭 친 녀석이 이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종인이 조금 전에 들은 말을 되새기는 동안 세훈은 종인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지는 걸 보았다. 회색 교복이 반쯤 걸어 나갔을 때까지도 가만히 앉아있던 종인은 벌떡 일어서더니 순식간에 성큼성큼 등 뒤로 다가갔다. 콰앙-!! 순식간에 뒤통수를 낚아챈 종인은 막 나가려는 녀석의 머리통을 쥐고 통유리에 그대로 갖다 처박았다. 기괴할 정도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얼굴이 유리문에 처박히는 소리에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주위의 소란에도 아랑곳 않고 종인은 그대로 문을 열고 이마와 코에서 피를 흘리는 녀석을 질질 끌고 나갔다. 오랜만에 제대로 돌아버린 종인을 본 세훈은 숨이 턱 막혔다. "재미를 봐?" 다급하게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을 때 종인은 이미 상대를 떡이 되도록 패고 있는 중이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어느덧 반쯤 줄어들은 무리들이 시멘트 바닥에서 사람이 개처럼 쳐 맞는 광경을 멀찍이서 관망하고 있었다. 얼굴 뿐 아니라 뇌까지 흐물흐물 녹아버릴 정도로 순식간에 열이 치솟는다. 저에게 제압당한 채 반항 한 번 제대로 못하는 녀석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겨대다가, 종인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 씨발." 얼굴에 튄 피를 닦으며 종인이 희게 웃었다. "어디야." 종인의 물음에 떡이 된 얼굴이 피가 끓는 목소리로 그릉거리며 웃었다. "어디냐고." "아무 사이도 아니라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종인은 이미 피투성이가 된 머리채를 쥐고 시멘트 바닥에 내리쳤다. 쾅, 쾅, 쾅. 지속적으로 시멘 바닥에 내리치는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들릴 지경이었다. 얼굴이 갈리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던 녀석은 이제 꺽꺽대는 신음소리만 겨우 흘려댔다. 지금 이상태로라면 종인은 녀석의 머리통을 아예 부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러다 길바닥에서 사람 하나 죽이겠다는 생각이 들은 세훈은 다급하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종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야, 헛짓 그만 하고 따라와." 이미 늦었을걸. 세훈을 따라 급하게 자리를 뜨는 종인의 등 뒤에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계획적인 거 같은데 혼자 가지 말고 애들 불러." "씨발, 지금 나보고 얌전히 기다리라고?!" 씩씩대며 대꾸하는 종인에게 세훈이 퍽, 소리가 나게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미친 새끼야, 내가 정신 차리라고 했잖아!" 얼결에 얼굴을 때려 맞은 종인이 거친 숨을 고르더니 초조한 듯 손톱 끝을 물어뜯으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지금 종인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머릿속으로 온통 도경수가 사내새끼들에게 엉망으로 돌려지는 장면이 떠올랐다. 아직 저도 가져보지 못한 걸 멋대로 돌린다고 생각하니 머리통이 터지는 건 아닐까 싶게 열이 치솟았다. "야, 니가 불러 모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종인은 세훈을 남겨둔 채 뛰었다. 익숙한 공터에 다다른 종인은 뛰던 발걸음을 서서히 줄였다. 숨을 고르면서 근처를 둘러보던 종인은 낡은 쇠파이프를 발견하고 주워 붕대를 감아 손에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다섯 명이 모여 있는 무리를 발견한 종인은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숨을 죽이고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모든 게 한눈에 정확히 보였다. 흥미롭게도 모여 있는 녀석들은 모두 다른 교복을 입고 있었다. 씨발, 뭐 파티라도 하냐. 드르륵- 걸음걸이에 맞춰 시멘바닥을 긁는 쇠파이프 소리에 무리지어 있던 이들이 뒤돌아봤다. 종인은 저를 향한 이들 사이로 쓰러져있는 도경수를 발견했다. 짧은 사이 종인은 많은 것을 보았다. 단정하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것과 하얀 뺨 위로 제가 낸 것이 아닌 상처와 풀어헤쳐진 상의, 버클이 풀린 교복바지, 나뒹굴고 있는 운동화까지. 퍼억-. 낡은 쇠파이프가 바로 달려든 상대의 얼굴을 가격했다. 제대로 들어맞은 얼굴에서 공중으로 핏방울이 튀었다. 쇠파이프를 통해 전해지는 둔탁한 감각이 혈관을 휘도는 피를 뜨겁게 달궜다. 실낱같이 남아있던 이성마저도 모두 사라진 종인은 순수하게 파괴하고 싶은 욕망만이 남았다. 퍽, 퍽, 퍼억-, 고깃덩이를 내리치는 감각은 언제 느껴도 기이했다. 작정한 것치고는 보잘것없는 상대였으나 종인은 사정을 봐줄 여력이 없었다. 다섯 명이 모두 곤죽이 되었을 때에야 종인은 널브러져있는 도경수가 눈에 거슬렀다. 온통 더러워진 옷차림으로 주저앉아 있는 도경수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종인은 피로 절여진 쇠파이프를 내던졌다. 종인은 말도 않은 채 얇은 손목을 꽉 붙들고 무작정 경수를 끌고 걸었다. 분이 안 풀리는 듯 무작정 걷던 종인이 우뚝 멈춰서더니 그제야 뒤돌아서 경수를 바라보았다. 새카만 눈동자가 투명해서 제 얼굴이 다 비칠 것만 같다. "몇 명이나 받았냐?" "……." "한 명? 두 명? 씨발, 설마 다?" "……." "말해." 좀처럼 열리지 않는 입술이 화가 나 돌아버릴 지경이었으나 억지로 말하게 할 수는 없었다. 분노로 씩씩거리고 있는 종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경수가 지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일 없었어." 경수의 대답에 종인이 믿지 않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일그러진 종인의 얼굴을 보며 경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말 믿어." "……." "거짓말 안 해." 단호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그제야 종인이 손을 들어 경수의 턱을 쥐고는 여기저기 얼굴을 살폈다. 제가 남긴 흔적들을 뒤덮는 상처들이 눈에 띄었다. "씨발놈들이 남의 걸 건들이고 지랄이야." 종인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경수가 숨을 멈췄다, 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네 거야?" "……."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고." "……." "넌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흔들림 없는 경수의 말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종인은 새카만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한 채 저에게 한 마디도 안지는 경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공기 중을 부유하는 먼지소리마저도 들릴 정도로, 세상이, 온통 고요해졌다. 종인은 한발자국 움직여 경수와의 거리를 좁혔다. 손을 들어 흙투성이가 된 머리카락을 쥐고, 상처투성이인 얼굴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때까지도 도경수는 흔들림 없이 가만히 서있었다. 종인은 눈을 감고 경수의 입술 위에 키스했다. 입술을 벌리고 따뜻한 숨이 섞여들었다. 입술을 뗀 종인은 다시 경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부터 좋아하면 되잖아." 새카만 눈동자가 우주라도 담겨있는 듯 빛났다. * * * 옥상으로 나있는 철제문은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탓에 문을 열 때마다 심하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오늘도 여전히 억지로 열리는 듯 심하게 비명을 지르는 문을 밀었더니 건너편에 난간 가까이 서 있는 세훈의 마른 등이 바로 보였다. 이른 아침의 청명한 공기 사이로 희부옇게 흩어지는 담배연기를 보며 종인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문 열리는 소리에 누가 왔는지 한 번 돌아볼 법도 하건만, 출입금지 지역에 들어와 있는 주제에 세훈은 고개 한 번 돌리지를 않았다. 세훈의 옆에 섰더니 발 아래로 모두 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끊임없이 학교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행렬이 한눈에 보였다. 세훈은 일주일에 세 번, 보통의 등교시간 보다도 이른 시간에 옥상을 찾아 등교하는 아이들을 지켜보곤 했다. "도대체, 넌 이게 재밌냐." "어, 재밌어." 희미한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세훈이 답했다. 세훈은 아침에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이 보인다고 했다. 종인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말이었다. 게다가 종인은 혹시나 있을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학교 측에서 잠군 옥상의 열쇠를 세훈이 어떻게 구해서 가지고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필래?" 옆에 선 종인에게 반쯤 타버린 담배를 흔들며 세훈이 물었다. 세훈의 물음에 종인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이 새끼 이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일부러 묻는 거다. "싫어." 알면서도 종인은 굳이 대답해주었다. 종인의 대답에 세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 꼬리를 올려 웃었다. 무질서하고 변칙적인 주제에 그 안에서 자신만의 규칙이 있어, 종인은 담배뿐 아니라 그 나이 대 애들이 구할 법한 싸구려 약이나 가스를 빠는 것 또한 좋아하지 않았다. 애초에 종인은 제 폭력적인 성향에 맞게 살 뿐 불필요한 일탈을 일삼는 게 목적은 아니었으니까. 김종인이 무서운 건 바로 그 지점에 있었다. 종인이 어느 순간 확 돌아버려서 사람을 죽일 듯이 패도 그건 정신이 나간 게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 과도한 폭력을 행사할 때 이성을 잃었다고 표현하지만, 종인은 오히려 정신이 매우 또렷한 상태일 확률이 높았다. 김종인은 가장 뇌가 깨어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오감을 충족시킬 수 있는 폭력을 행사했다. "어제는 어떻게 된 거야." 필터 가까이 다 타버린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면서 세훈이 물었다. 급하게 연락을 돌리고 뒤늦게 공터로 뛰어갔더니 상황은 이미 모두 끝나있었다. 세훈은 거의 피 떡이 되서 쓰러져있는 다섯 명의 교복을 확인하다가 이상한 생각에 피와 먼지로 엉망이 된 얼굴들이 누구인지를 살폈다. "아, 어제 그 새끼들. 별 거 아니던데." 툭 말을 내뱉었다가 종인도 이상한 듯 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둘 사이에 흐르던 침묵을 먼저 깬 건 종인이었다. "왜 그런 피라미들을 보냈지?" 세훈은 모두 다 다른 교복을 입고 있던 녀석들을 떠올렸다. 다섯 명이서 겹치는 교복이 있다 하더라도 적어도 세 학교는 되어보였다. 심하게 뭉개진 얼굴을 확인한 세훈은 모두 종인과 상대 될 급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종인이 화가 나 있었다고 해도 싸우는 급이 다른 녀석들이었다. "그거, 너 떠본 거야." 어쩐지 입안이 바짝 마르는 듯했다. 한 대 더 태울까, 생각하며 세훈이 말했다. "말해잖아. 소문이 안 좋다고." "……." "이제 시작이야." * * * 오늘도 어김없이 도경수는 아침 일찍부터 아무도 찾지 않는 본관 뒤의 화단을 혼자 찾았다. 종인은 멀찍이 떨어져서 혼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푸릇한 잎사귀를 살피는 경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언제 보아도 쪼그려 앉은 몸이 말아놓은 듯 더욱 작아보였다. 아무리 김준면이 부탁했다고 하지만 도경수 성격에 스스로 손에 흙을 묻혀가며 열심히 화단을 돌보는 게 종인으로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 성향을 거스를 정도로 김준면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 다시 기분이 썩 좋진 않다. 이제부터 좋아하면 되잖아. 말했더니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졌다. 확장된 우주가 곧 깜빡이는 눈꺼풀에 가려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짧은 시간이 오랫동안 무디게 흘러갔다. 종인의 말에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던 도경수가 이내 피식 웃었다. "못 믿어." 곰곰이 생각했다가 확신을 가지고 단칼에 자르듯 말하는 게 도경수다워서, 종인은 수긍하고 말았다. 어차피 믿음이나 동의를 구하는 말은 아니었기에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감정을 거부당한다고 해서 상처를 받지도 않았다. 종인은 단지 제 마음을 스스로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켰을 뿐이었다. 기분이 불쾌한 건, 결국 김준면에게 졌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거부했던 감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실체가 되었고, 구체적인 말은 힘을 가지고 종인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다. 좋아하느냐고 묻는 그 모든 말들을 비웃던 종인은 도경수에 관한 어떤 감정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김준면이 말하는 대로 되었다. 도경수는 이제 조심스러운 손길로 흙을 다독이고 있었다. 불과 며칠 사이에 흙 위로 겨우 푸릇한 잎을 보이던 새싹은 어느덧 쑥쑥 자라나 있었다. 몇 번 흙을 다독이던 경수가 쪼그려 앉은 채로 제 손바닥을 펴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손톱 끝까지 단정한 손바닥 위로 드문드문 흙이 묻어나 있었다. 종인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 다가가는 동안에도 경수는 줄곧 더러워진 제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쪼그려 앉은 동그란 몸을 등 뒤에서 안았더니 한 품안에 들어왔다. 흙이 묻은 낯선 손을 붙들고 귓가에 짧게 키스했다. 촉, 소리가 나는데도 반응이 없다가 입술이 목덜미로 옮겨가자 도경수가 어이없는 듯 말했다. "넌 아침부터 발정 나냐?" "도경수 냄새 좋다."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희미한 살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입술 위로 스치는 부드러운 살결을 씹고 싶었다. 살짝 입술을 열어 혀를 내밀어 핥았다가 가볍게 깨물었더니 품에 가둔 몸이 작게 움찔했다. 식욕이 돋았다. "먹고 싶어." 속삭였더니 도경수가 몸을 밀치고 품안에서 벗어났다. "짐승 같은 새끼." 여전히 틈도 없는 도경수가 좋아서 돌아버릴 것 같다. 그래, 좋았다. 도경수가 좋아한다는 제 말에 쉽게 흔들릴 거였으면 이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순순하지 않고 쉽게 정복되지 않는 주제에 순결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까지, 무엇 하나 빠짐없이 좋았다. 이제 저를 무시하기로 한 모양인지 품에서 벗어난 도경수는 다시 화단에 집중했다. 풀꽃을 돌보느라 걷어 올린 셔츠 아래로 새하얀 팔뚝이 눈에 띄었다. 하얀 팔뚝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상처를 보며 종인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낸 상처가 아니었다. 그제야 여기저기 새로운 상처들이 눈에 띄었다. 목덜미를 심하게 붙들린 듯 여직 손자욱이 나있는 걸 보며 종인은 그때 그 새끼들을 좀 더 손봐주는 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산발적으로 피부가 긁히고 뜯긴 상처들이 반항의 흔적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제게 했던 것만큼이나 격렬하게 반항했을 도경수를 생각하니 어쩐지 즐거워졌다. "너 정말." "……." "당한 거 아니지." 도경수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걸 알았으나, 종인은 굳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천천히 움직임을 멈춘 도경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순간의 침묵이 무거웠다. "맞다고 하면." "……." "어쩔 건데." 얇은 손목을 붙들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더니 힘에 끌려서 일어선다. 저하고도 악력의 차이가 이렇게까지 나니 다섯 명이 작정하고 달겨드는 건 더욱 어쩔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눈가에 선명한 붉은 상처 위에 입을 맞췄다. 뭐야-. 버둥거리려고 하는 것 같아서 양 손목을 붙들고 말랑한 뺨 위로 긁힌 상처를 핥았다. 그 아래에도, 또 그 아래에도 새로운 상처 위로 입을 맞추다가 턱 언저리에 올라오기 시작한 멍자욱을 빨아들였다. 마음 같아서는 상처 위에 모두 다 새로운 흔적들을 새기고 싶다. 제가 남긴 게 아닌 건 모두 다 뒤덮고 싶다. "아, 진짜 좀." 짜증스러운 듯 밀쳐내는 손에도 밀리지 않고 종인은 경수의 머리채를 쥐어 잡은 채 가까이 얼굴을 마주했다. 코끝으로 바로 고른 숨이 닿는다. "너한테 상처 낼 수 있는 건 나뿐이야." "뭐?" "내 거니까." 도경수의 질서를 흐트러트리는 것도 매끈한 표면에 상처를 내는 것도 모두 다 제가 되어야했다. 다른 어느 누구도 손댈 수 없어야 했다. 하…. 어처구니없는 듯 웃던 경수가 종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넌 진짜 미친 새끼야." "맞아." 마주친 시선이 흔들림 없이 종인을 응시했다. 유리알처럼 반들거리는 투명한 눈동자 위로 제 모습이 비친다. "정말 아니야." 그래. 그럼 되었다. 경수의 말에 그제야 종인은 휘어잡은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사실 정말로 당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늘 단정하게 단추를 채우고 있던 교복이 반쯤 벗겨져 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자리에 있던 새끼들을 다 갈아놨어도 성질이 풀리지 않았다. 물론 정말로 범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지만. 말아 올린 교복 셔츠의 소매를 다시 풀어 내리는 경수를 눈으로 쫓으며 종인은 입술을 훑었다. 정확히 누가 시킨 짓인지 아직 모르겠지만, 세훈의 말대로 저를 떠볼 생각이었다. 도경수의 이름에 어떻게 반응하고 움직이는지. 도경수 단도리 잘 해. 세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따라붙었다. 어차피 난 소문이라면, 좀 더 확실하게 도장 찍고 싶다. 좀 더 확실하게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건 그렇고." 소매 끝 단추까지 꽉 채우고 툭툭 먼지를 털어 옷매무새를 다듬은 도경수가 종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날파리나 좀 안 꼬이게 해." 말해보라는 듯 턱짓을 했더니 도경수가 피로한 얼굴로 말했다. 날파리. 영문도 모른 채 질질 끌려가서 억지로 사내새끼들한테 윤간 당할 위기에까지 처했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일 취급을 한다. 도경수의 이런 면이 좋아서 못 견디겠다. 무슨 상황이 닥쳐도 절대로 꺾이지 않을 것 같았다. "너 때문에 매일이 엉망이야." "……." "여기 저기 상처나 생기고." "……." "이상한 새끼들이나 꼬이고." 김종인만으로도 충분한데. 말을 덧붙이면서 뭐가 우스운지 도경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 때문에 나한테 없었던 일들만 생겨." "……."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데." 김종인은 견고하게 지켜왔던 도경수의 세상을 자꾸만 변화시켰다. 무섭도록 날뛰는 종인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애를 써도 결국 자꾸만 바스라지는 세상의 파편에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만다. 가까이 다가온 종인이 손을 붙들었다. 하얀 손바닥 위에 난 가느다란 손금을 타고 아직 미처 닦아내지 못한 흙이 배었다. 깨끗하지 않은 손을 붙잡고 종인이 손바닥 깊숙이 키스했다. 따뜻한 숨에 어쩐지 몸이 움츠러들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글쎄." 애매한 대답에 손을 붙들고 가만히 서있으려니 도경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르지. 앞으로 잘 하면 예뻐해 줄지도." "……." "그러니까 나한테 잘 해봐." 툭, 어깨를 치고 도경수가 웃으며 제 곁을 스쳐지나 갈 때까지도 가만히 서있던 종인은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도경수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화단에 덩그러니 남은 종인은 한참을 혼자 웃어댔다. 역시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도경수를 약한 놈 취급하는 건 싫다. * * * 똑똑. 학생회실의 문을 두들겼더니 들어오세요, 하는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잠시 틈을 두었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드르륵- 열리는 문 사이로 책상에 앉아있는 준면이 보였다. 공부하는 중이었던지 책상 여기저기에 책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경수를 발견한 준면이 짧게 웃었다가 집중하느라 코끝으로 흘러내린 안경을 벗었다. 경수가 앞으로 다가가는 동안 준면은 피로한 듯 눈가를 꾹꾹 눌렀다. "앉아." 짧은 한숨과 함께 준면이 말했다. 준면의 건너편에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경수는 빽빽하게 필기된 공책 위로 안경과 필기구들이 놓인 걸 보았다. 책상 위에는 수험서와 함께 경수가 알지 못하는 내용의 프린트들이 흐트러져 있었다. 아마도 학교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 있었나보다고 짐작할 때였다. 무심코 프린트의 내용을 훑다가 본관 뒤에 있는 화단의 필요에 대한 내용이 시선에 걸렸다. "그래, 무슨 일이야?" 경수의 시선을 느낀 준면이 말을 건네며 자연스럽게 프린트를 갈무리해 시야에서 거둬갔다. "아, 꽃을 새로 더 심을까 하는데요." "응. 무슨 문제 있어?" "문제는 아니고." 말을 꺼냈다가 경수는 입술을 도로 다물었다. 다음 말이 잇기가 쉽지 않아 잠시 도르륵 눈을 굴리는 사이 준면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가지런히 모은 다리 위에 얹어진 손끝을 몇 차례 만지작거리다가 경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특별히 좋아하는 꽃이라도 있는지 궁금해서요." 마지막 말은 목소리가 작아져서 거의 속삭이듯이 들렸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듯 준면의 눈이 크게 떠졌다가 이내 웃음기를 머금었다. "난 뭐든 좋아." "……." 턱을 괸 준면이 무의식적으로 들고 있는 펜을 톡, 톡 공책 위로 두들기며 답했다. 준면이 부탁한 것이니 선배가 좋아하는 꽃 하나쯤은 심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뭐든 좋다는 준면의 말에 차마 더 물을 수 없어 경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펜을 쥔 손끝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공책 가득 빡빡하게 들어찬 글자들을 보고 있으려니 새삼 준면이 수험생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수험에만 집중해도 부족할 시간인데 준면은 그 외에도 많은 일들을 해내곤 했기에 경수는 종종 그가 수험생이라는 걸 잊고는 했다. "화단, 왜 저한테 맡겼어요?" 학교에서 없애기로 결정한 화단이었다. 책상위에 흩어진 프린트 위에 빨간색 글씨로 낙인처럼 '폐기' 라고 쓰여 있었다. 선생님들께 신뢰를 받는 준면이었기에 버림받은 화단 하나쯤은 쉽게 얻을 수 있었겠으나, 굳이 자신의 손으로 꽃을 심어 가꾸고 싶은 생각은 없던 게 분명했다. 조금 전 준면의 대답은 그러한 생각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네가 잘 할 거 같아서." "선배야말로 뭐든 다 잘 하잖아요." "꼭 그렇지만도 않아." 경수의 대답에 준면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답했다. 어느덧 펜으로 공책 위를 두들기던 손길이 멈춰있었다. "다만 엄청나게 노력할 뿐이지." 준면은 무엇이든 노력하면 다 해낼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듯 했다. 노력만으로는 될 수 없는 것도 있는데. 생각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아마 정말로 준면에게 불가능 한 건 없을 테니까. "선배는 알잖아요." "……." "제가 흙 묻히기 싫어한다는 거." 준면은 경수가 단순히 맡은 일이 귀찮거나 번거로운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니란 걸 알았다. 도경수는 자신의 성향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고 단정해서 더러운 것 하나 쉬이 묻히지 않는 아이였다. 경수가 직접 입 밖으로 내어 말한 적은 없었으나 준면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경수 또한 준면이 자신의 모습을 간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알면서 왜 굳이 저에게 시켰느냐고 경수는 묻고 있었다. 제가 거절하지 못할 것까지도 알고 있으면서. "사실 화단 같은 거 별로 중요하지 않죠." 혹시 제 말에 준면이 기분 나빠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경수는 끝까지 물었다. 준면에게는 다 쓰러져가는 화단 따위 말고도 신경 쓸 게 산더미였다. 준면에게 중요한 건 화단이 아니라 그걸 자신이 가꾸도록 시키는 게 중요한 거였다. 그걸 최근에야 깨달았다. 제가 꽃나무를 심고 가꾸는 게 뭐가 중요한지 그것까진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안타까운 듯 준면이 작게 말했다. 혹시 저를 나무랄까 싶어 짧은 순간 경수는 마음을 졸였다. 학교 내에서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는 사람이지만 경수는 아직도 준면이 어려웠다. "들켜버렸네." 들려오는 목소리에 경수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준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답하는 입가에 퍼진 미소가 싱그러웠다. "그래서, 싫어?" 은근히 건네 오는 물음에 경수가 생각하는 듯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곧 곤란한 표정으로 웃어버렸다. "아니요." 준면이 처음 일을 맡길 때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면서도 곤혹스러운 마음이 컸다. 어렸을 때 누구나 한 번쯤 다 키워보던 애완동물은 물론 조그만 화분조차 가져보지 않았으니, 제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키워내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겨우내 얼어있던 조그만 화단을 봤을 때, 이걸 다 갈아엎어야 한다는 생각에 한숨부터 나왔고 무엇보다 제 손으로 직접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따뜻해지는 봄 햇살과 함께 싹을 틔우는 이파리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을 때의 설렘은 그동안의 불쾌함과 고생을 상쇄시키고도 남았다. 경수는 어느덧 손바닥에 닿는 부드러운 흙의 감촉에 익숙해졌다. 정성들여 갈아낸 흙 위에 따뜻한 햇살과 적당한 물로 파릇한 생명력이 돋아났다. 처음 얼어있던 흙덩이를 부술 때의 번거롭고 불쾌했던 기억 같은 건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 그런 거야." "……." "아마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야." 어쩌면 준면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생각에 빠진 경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준면이 입을 열었다. "김종인도." "……." "그럴 거야." 예상치 못하게 종인의 이름을 들은 경수는 눈만 깜빡였다. 준면의 입에서 나온 종인의 이름이 어딘지 이질적으로 느껴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걘 그냥 미친놈이에요." "그런가." 준면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를 보는 준면의 얼굴이 어쩐지 즐거워 보여 곤란해진다. 왜 갑자기 종인의 이야기를 꺼낼까, 생각했다가 언젠가 제가 종인 때문에 펑펑 울었던 것을 준면이 발견한 적이 있던 걸 기억해냈다. 그 미친놈이 체육시간에 운동장에 나가지 않은 걸 어떻게 알고 교실까지 찾아왔을 때였다. 이전까지 견고한 제 세상 안에서 나름 평화로웠던 경수는 종인을 만나고 엉망으로 부서지고 흐트러지는 자신이 당혹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때 경수는 종인이 침입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나름 필사적이었다. 그 미친놈이 바로 목 끝에 커터칼이 있는데도 다가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김종인이 다가오는 방식은 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 더 이상 도무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만들었다. 경수는 아직까지도 커터칼을 쥔 손끝으로 생살이 베이던 감각과 흰 셔츠 위로 짙게 배어들어가던 새빨간 피가 선명했다. 그러나 경수는 그 일이 있기 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직접적으로 김종인에 대해 준면과 이야기 한 적은 없었다. 아마 굳이 제 성향을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던 것처럼, 모든 걸 말하지 않아도 준면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나저나- 상처가 아물 날이 없네."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준면이 경수의 얼굴을 훑었다. 매번 볼 때마다 새로운 상처가 늘어나는 것 같았다. 이제 좀 예뻐해 주라니까. 속으로 쯧, 짧게 혀를 찬 준면은 경수의 목덜미와 팔뚝에 엉망으로 덧난 상처들을 이상한 듯 다시 살폈다. 단순한 악다구니로 난 상처치고는 심하게 짓이겨졌다. 김종인이라면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상처 내지는 않았을 텐데. "무슨 일 있었어?" "아, 아니요." 종인의 일도 그렇거니와 그로인해 일어났던 일들을 준면이 굳이 알 필요는 없었다. 준면은 지금도 충분히 신경 쓸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쓸데없는 일로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하교하던 길에 전혀 모르는 교복을 입은 무리들이 다가왔을 때만 해도 경수는 전혀 경계를 하지 않았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치거나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없으니 누군가 자신에게 어떤 불쾌한 의도를 가지고 다가올 일도 적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도경수냐?" 다짜고짜 이름을 묻는 게 불쾌하기는 했으나 경수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상상도 못한 것이었다. 이름을 확인한 이들은 갑자기 자신을 결박하고는 억지로 끌고 가려고 했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격렬하게 반항을 해보아도 애초에 다섯 명을 혼자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게 끌려간 곳은 공사가 중단된 듯한 외진 공터였다. 그제야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엉망으로 흙바닥에 나뒹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전까지 겪어보지 못한, 앞으로도 제 인생에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정말 이 새끼 때문에 김종인이 올까?" 저를 앞에 두고 초조한 듯 파란 셔츠를 입은 이가 말하는 것을 들으며 경수는 제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신했다. 김종인이 저의 세상을 허물고 엉망으로 헤집는 것도 모자라서 그 때문에 외부로부터 침범까지 감내해야 하다니. 새삼스럽게 종인에게 분노가 차올랐다. "범생이 같이 생겨서 능력 좋나봐. 김종인도 꼬셔내고."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던 이들 중 한명이 경수의 앞에 쪼그려 앉더니 말했다. 이죽거리는 얼굴이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아 뻔히 바라보았더니 노려보는 거 봐라, 하면서 투박한 손으로 머리를 툭 쳤다. 하다하다 이제 별 잔챙이들이 다 들러붙는다. 머리를 친 손길이 기분 나빠 같이 손을 들어 머리를 쳤더니 상대가 이 새끼가! 소리를 지르며 발끈했다. 경수는 대체 제가 여기서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야, 너 구멍 맛 좀 보자. 미친 새꺄, 진정해. 아직 그것까진 안 시켰어. 씨발, 간만 보자고. 진짜인지, 아닌지. 고작 이 새끼 때문에 그 미친놈이 움직일까? 얼굴은 좀 반반한데. 얼마나 잘 조이면 천하의 김종인이 정신 못 차리고 쫓아다녀? 혹시 반대 아니야? 이 새끼 좆 질이 죽여줄지도. 야, 만져 봐. 만져 보면 알겠지. 저를 앞에 두고 오가는 저질스러운 얘기에 경수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날까 고민하는데 다섯이서 달겨들더니 팔을 붙들었다. 셔츠 단추가 풀리는 것에 앞으로 다가올 상황이 그려져 경수는 숨마저 멈췄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다리를 들어 배를 가격했다가 양 다리도 붙잡혔다. 교복 바지 버클이 풀리는 순간, 경수는 이대로 당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김종인이 등장한 것은. 거친 시멘트바닥을 긁는 쇠파이프 소리에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경수는 그 날 처음 봤다. 김종인이 싸우는 모습을.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그 정도로 미쳐 날뛸 줄은 몰랐다. 눈앞에서 피가 터지고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장면이 생생했다. 물 흐르듯 움직이는 쇠파이프가 마치 춤을 추는 듯 했다. 다시 생각해도 기이한 장면이었다. "김종인이 또 못된 짓 하면 혼내줄게." 그가 한 짓이 아닌 걸 알면서도 준면은 굳이 말해봤다. 짐짓 장난스러운 준면의 말에 경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거 정말 아니에요." 아마 며칠 전 있던 일은 전초전일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 종인에게 날파리 좀 꼬이지 않게 하라고 말 한 건 진심이었다. 저의 세계를 부수어내는 건 김종인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이상 피로한 일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 앞으로 잘 하면 예뻐해 줄게. 어쩌다 그런 말을 하게 된 걸까. 기억을 더듬으면서 경수는 새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제가 느끼기에도 우스운 말이었다. 살면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해봤다. 이질적이고 낯선 감정이 손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왔다. 간지러운 손가락을 접어 주먹을 쥐고 맞닿은 무릎 위로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경수는 저를 빙글거리며 바라보고 있는 준면을 바라보았다. 그런 걸까. 정말 모든 게 다, 괜찮은 걸까. 저의 세상을 부수는 김종인까지도.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들겼다. 아, 시간이 벌써. 노크 소리에 시계를 보더니 준면이 작게 말했다. "약속 있으세요?" "응. 다음에 또 얘기하자." 준면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선 경수가 고개를 숙여 인사 했다. 경수가 뒤돌아 선 것과 문이 열린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옆으로 열리면서 키가 큰 하얀 얼굴의 남자가 들어왔다. 서늘함마저 느껴지는 가느다란 눈매가 문 안쪽에 서있는 경수를 힐끗, 바라보았다. "왔어?" 세훈아. 반가운 듯 이름을 말하는 준면의 목소리가 경수의 귓가에 와 닿았다. 세훈…? 어디서 들었더라? 저를 위아래로 훑는 시선에 기억을 되짚어 보았으나 선뜻 생각이 나질 않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예리한 눈매가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한 번 더 보면 기억이 날까 싶어 경수가 힐끗 뒤 돌아 보는 사이, 세훈이 가느다란 손으로 문을 닫아버렸다. 닫히는 문틈 사이로 슬며시 미소 짓는 입술이 보였다. 기분 탓인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경수는 고개를 젓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 * * 하교하는 시간엔 어느 곳이든 교실에서 쏟아져 나온 온갖 무리들로 가득했기에 경수는 항상 혼잡스러운 시간대를 피해 느지막이 교실을 나섰다.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학교는 언제 하루 종일 지글지글 들끓었는지 모르게 조용했다. 교문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걷는데 운동장 주변을 두르고 있는 화단에 문득 눈길이 갔다. 제가 일구는 것도 아닌데 늘 그냥 지나쳤던 것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날씨가, 좋다. 내리쬐는 햇살이 기분 좋은 바람을 타고 부서져 내렸다. 한산한 교정을 나서는데 육중한 철제문 옆으로 서있는 김종인이 보였다. 지루한 듯 나른하게 반쯤 감긴 눈이 경수를 발견하자마자 번쩍 뜨이는 듯했다. 마치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빛났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종인의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웃음기를 머금었다. 이 시간까지 저를 기다린 것일까. 생각했다가 경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김종인은 다듬어지지 않은 사나운 맹수였다. 필시 또 무슨 짓을 벌일까 싶어 경수는 이내 종인을 무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교문 앞에 얌전히 서있는 종인을 못 본 체 하며 교문을 나섰더니 등 뒤로 조급하지 않게 저를 쫓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걸음걸음 걷는 발걸음마다 끈질기게 들러붙는 시선이 느껴진다. 결국 경수는 등 뒤가 신경 쓰여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왜." 뒤 돌아보았더니 멈춘 발걸음에 맞춰 같이 멈춰선 종인이 조용히 저를 바라보았다. 섣불리 짜증을 내기엔 아무래도 날씨가 지나치게 좋았다. 어쩐지 너그러운 마음이 든다. "데려다주려고." 생각지 못한 대답에 말문이 막히고 만다. 경수는 몇 발자국 떨어져있는 종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삼 둘 사이의 거리감이 낯설었다. 늘 틈도 없이 몰아붙이는 종인 탓에 둘 사이의 거리는 늘 경수가 예상치 못할 정도로 가까웠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줄곧, 물리적인 거리감을 크게 느껴본 적이 없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그러했던 때가 바로 얼마 전인데, 종인은 그새 멀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했다. 그래도 손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닿을 것 같은 거리였다. 무심코 손을 뻗게 될까 두려워져 슬그머니 주먹을 쥐어 숨겼다. "싫어?" 종인이 물었다. 아니. 바로 드는 생각에 오히려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싫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머릿속으로 천천히 말을 고르는 사이 종인이 피식 웃었다. "싫지 않으면, 허락해 줘." "좋아." 대답하고 바로 뒤 돌아서 버렸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뛰어대서 들킬까 두려울 정도였다. 제 속도를 잊고 뛰어대는 심장에 숨이 막힌다. 김종인의 행동하는 데에는 '왜' 라는 물음이 필요 없었다. 그의 모든 행동은 오로지 그 자신이 그러고 싶으니까 라는 이유뿐이었다. 그렇기에 김종인이 행동하는 데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런 종인이었기에 아마도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는 건 그에게는 매우 낯선 종류의 것이 분명했다. "뒤에 서 있지 마." 몇 발자국 옮기는 동안 뒤에서 따라붙는 발걸음이 거슬렸다. 낯선 거리감, 낯선 말들, 그리고 낯선 행동들에 온통 신경이 곤두선다. "신경 쓰여." "……." "차라리 옆으로 와."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저도, 낯설기 짝이 없다. 경수의 말에 종인이 잠시 멈췄다가 이내 웃으며 주저 없이 옆에 섰다. 나란히 걷는 사이 단번에 가까워진 거리 탓에 팔뚝이 스치듯 부딪혔다. 지나치게 반응하는 것 같지만 자꾸만 몸이 움츠러든다. 늘 미처 깨닫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다가왔기에, 바로 곁에 있다는 걸 인지하는 건 처음이었다. 나란히 걷는 동안 종인도 경수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김종인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종인이 말을 건넨 거라곤 버스정류장을 지나쳐가는 저에게 집이 가까우냐고 물은 게 다였다. 가깝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버스를 탈 정도로 먼 거리도 아니었기에 걸을만한 거리라고 대답해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 없이 걸었다. 교복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나른하게 걷는 종인은 종종 주위를 유심히 살폈다. 주위에 경계를 세우는 거대한 육식동물을 거느리고 걷는 기분이다. "다 왔어." 줄곧 옆에 서서 걷는 종인이 신경 쓰인 탓인지 평소보다 더 늦은 시간에 집에 도착한 것 같다. 경수의 말에 종인이 파란 대문을 바라보았다. "이제 돌아가." 줄곧 종인에게 신경 쓰느라 피곤해진 경수가 할 말을 끝내고 뒤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예뻐해 줘." "뭐?" "잘 하면 예뻐해 준다며." 종인이 말하는 것이라고 믿을 수 없어 공기 중을 울리는 목소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까맣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진득하게 저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닿은 시선이 뜨겁다. 가만히 서서 저를 응시하는 종인을 보며, 경수는 거대한 육식동물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가 순한 대형견처럼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얌전히 서서 칭찬을 바라는 종인의 행동에 경수는 말을 잃고, 고요한 시선을 들어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뭘 원해?" 어떻게 반응해야할까 생각했다가 저도 미처 생각지 못하게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키스라도 해줄까?" 제가 먼저 말해놓고도 어쩐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런 거 말고." 종인이 한 발자국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키스를 거부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기에, 이어질 종인의 행동에 대한 불길한 생각으로 온몸이 긴장했다. 벌써부터 손끝에서부터 자잘하게 소름이 돋는 듯하다. "한 번만 안아보자." 순간 거대한 침묵이 온몸을 뒤덮었다. 시간마저 무디게 흘러가는 적요한 우주 속에 버려진 듯, 세상에 단 둘만이 남겨진 기분이었다. 종인이 하는 말이 단번에 와 닿지 않아 글자를 하나하나 다시 곱씹는 사이, 깜빡, 닫혔다 열리는 눈꺼풀 사이로 흔들림 없이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김종인이 보였다. 그러지 마. 절박한 마음속 외침이 들렸다. 늘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가오기는 했으나, 이런 말은 반칙이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종인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면 제가 본능적인 거부를 느끼는 게 옳았다. 순식간에 두려움이 온몸을 잠식해와 안된다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종인이 성큼 거리를 좁혀 가까이 다가와 몸을 끌어안았다. 종인의 손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 뒤통수를 꾹 내리눌렀다. 경수는 얼결에 종인의 교복 자켓 위로 고개를 묻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피부에 섬유유연제향이 나는 하얀 셔츠가 문질러지면서 코끝으로 종인의 체취가 훅 끼쳐왔다. 이전에 어디서 맡아본 적 없는 독특한 타인의 체취였다. 경수는 차마 종인을 마주 끌어안지 못한 채 손을 어쩔 줄 몰라 허공에 그대로 뒀다. "역시 한 품이네." 정수리 위로 간지럽게 종인의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두근, 두근. 뛰는 심장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종인이 내는 소리인지 제가 내는 소리인지 분간할 수가 없어 혼란스러워진다. 경수는 허공에 멈췄던 손을 조심조심 움직여 종인의 등 뒤로 둘렀다. 고요한 세상이, 뒤흔들린다. "앞으로 일주일." 몸을 마주 끌어안은 채 종인이 경수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심장이 몸을 이탈할 것처럼 더 맹렬하게 뛰어댔다. "일주일이면 이 흔적들은 모두 사라지겠지." 종인의 손이 섬세하게 경수의 얼굴 위에 난 상처들을 훑었다. 눈두덩이에 옅은 멍 자국부터 뺨 위에 난 자잘한 생채기들, 완만한 턱 끝에 찢긴 상처를 지나 가느다란 흰 목덜미까지 종인의 손이 물 흐르듯이 움직였다. 늘 지나칠 정도로 단정하게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던 경수의 몸은 저를 만난 이후로 하루도 깨끗할 날이 없었다. 경수의 매끈한 표면은 온통 종인의 흔적들로 뒤덮여 있었다. 새벽 내 내린 첫눈을 처음 밟는 심정으로 종인은 깨끗한 피부 위에 제가 낸 붉고 푸른 상처들을 보는 게 즐거웠었다. "앞으로 다시는." "……." "너한테 상처내지 않을 거야." 깨끗하고 단정한 도경수 위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상처들은 지금 생각해도 제법 예뻤다. "그러니까 너도 엄한 놈한테 상처 달고 나타나지마." 제가 아닌 누군가 도경수에게 상처를 내는 것은 물론 도경수가 다른 이의 흔적을 달고 나타나는 것은 용납하기 힘들지만, 어쩌면 앞으로 몇 번이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종인은 경수가 하는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모두 확인하며 쫓아다닐 수는 없었다. 그 생각 일면에는 졸졸 쫓아다니면서 연약한 계집애 돌보듯이 관리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다. 도경수를 약한 놈 취급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게다가 저 말고 다른 누구도 낼 수 있는 상처라면, 이제 그런 것 따위엔 관심 없다. 종인의 말에 경수가 시선을 들어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저 시선이 오로지 저만 향했으면 좋겠다. "네가 잘 해." "……." "난 그딴 걱정 안 해." 흔들림 없는 경수의 말에 종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래야 도경수 답지. 역시 제가 좋아할만 한 놈이었다. 종인은 도경수를 발견한 제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오로지 완벽하게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 이제 매끈한 표면에 흔적을 남기는 것 대신 좀 더 내밀한 것을 원하게 된다. "들어간다." 슬그머니 뜨거운 혀를 내밀어 입술을 훑는 종인을 툭 치며 경수가 말했다. 파란 대문이 닫히고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종인은 제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자그마한 등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종인은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확인해보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다. 제가 가봐야 할 곳을 상기시키며 종인은 발걸음을 옮겼다. * * * 점점 더 속도를 높이는 바이크 모터 소리에 맞춰 세찬 바람이 정신없이 얼굴을 때렸다. 한계를 모르고 빨라지는 속도에 심장이 튀어나올 듯 마구잡이로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종인은 좀 더 속력을 높였다. 부아아앙- 위협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모터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크게 울렸다. 제 몸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속도의 한계치를 시험할 것처럼 빠르게 달린다. 피부에 직접적으로 닿는 속도에 온몸이 붕 뜨는 것처럼 현실감이 사라진다. 주변에 겉멋 들어서 바이크를 끌고 다니는 놈들은 차고 넘쳤지만, 종인이 바이크를 끄는 이유는 그런 시시한 것에 있지 않았다. 애초에 종인이 행동하는 데는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은 하나도 없었다. 종인의 행동에는 그 자체에 목적성이 있었다. 비현실적인 속도가 빠르게 쾌감을 증폭시켰다. 새삼스레 오랜만에 속도감을 체감하는 걸 깨닫는다. 이전에는 거의 매일같이 바이크를 끌고 다니던 때도 있었다. 본능적이고 즉발적인 관계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오로지 순수한 상태의 폭력성을 충족하던 때였다. 권력과 힘의 관계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상대를 어떻게 정복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했기에 종인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상대를 생각해 본적이 거의 없었다. 종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순수한 폭력성을 충족시킬만한 만족뿐이었다. 조금의 틈만 보여도 잡아먹히는 세계에서 종인은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짐승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었다. 속이야 어떻든 어느 누구도 종인에게 쉽사리 함부로 대들지 못했고 더러는 잘 보이고 싶어 꼬리를 흔들어댔다. 그러나 도경수를 만난 이후로 모든 게 미묘하게 비틀려가고 있는 걸 깨닫는다. 이전까지 종인이 행해왔던 모든 것들은 도경수에게 조금의 흠집도 남기지 못했다. 표면에 난 상처들은 극히 미미한 일부일 뿐이었다. 극단적인 폭력으로 상대를 정복하는 것에 익숙하던 종인에게 도경수는 이전에 만났던 이들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존재였다. 이전에 행했던 것들이 통하지 않는다면, 이제 더 이상 폭력적으로 다가가지 않아도 좋았다. 너의 세상에 허락을 구하고 들어간다.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낯선 감정과 행동들이 종인을 지배했다. 도경수의 세상을 무너트리는 것은 저라고 생각했는데, 종인은 미처 깨닫지 못한 새 저의 세상에 온통 가느다란 균열이 가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느 순간, 잘못 건드리면 순식간에 모조리 다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져버릴 것 같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머릿속에 들끓던 상념이 끊겼다. 단순히 버스로 몇 정거장 떨어진 동네일뿐이지만 종인이 속한 세계에서는 힘과 권력으로 모든 것을 나누듯 구역도 철저하게 나누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은 종인의 영향력이 적은 다른 이의 구역이었다. 자신이 영향력을 미치는 곳이 있는 만큼 다른 이의 영향력도 존중하지만, 요란하게 바이크를 끌고 온 건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걸 핑계로 저를 과시하는 거다. 남의 구역에까지 가서 요란하게 바이크를 끌고 가 소리를 내는 건 아무나 하지 못했다. "변백, 있냐." 방과 후에 무리를 지어 노는 놈들이 모이는 곳이라고는 뻔했다. 같은 교복을 입고 다글다글 모여 있는 사내자식들 사이에서 쪼그만 얼굴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살짝 쳐진 눈매가 종인을 발견하고는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몸집이 작은 탓에 덩치 산만한 사내자식들이 둘러 싸여있는 모양새가 흡사 삥 뜯기고 있는 중딩이라고 봐도 좋을 법했다. 저 쪼그만 녀석이 덩치 큰 녀석들을 쥐락펴락 한다는 건 아무도 생각 못하겠지. 그렇게 알고 보면 참 우스운 장면이었다. 순진한 하얀 얼굴이 해사하게 웃으며 종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와, 정신 빠진 김종인이네." "개새끼가 보자마자 개소리하고 자빠졌다." 거침없는 종인의 말에 백현이 신난 듯 웃으며 쪼르르 달려오더니 종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이게 왜 이러나 싶어 종인이 내려다보았더니 백현이 생글거리며 말했다. "어휴, 빼지 마. 우리 동네까지 소문 다 났어." "뭐." "김종인이 요새 정신 빠졌다고." 눈매가 웃음기를 머금고 휘어졌으나 속삭이는 말이 만만치 않아 순식간에 기분이 불쾌해졌다. "빠지긴 뭘 빠져." "정신머리 놓고 다니지 말라고. 그러다가 뒤통수 맞을라." 빵- 총 쏘는 듯한 모양새를 하며 백현이 낄낄거렸다. "너한테?" "씨발, 넌 뭐만하면 날 의심하더라?" 발끈한 백현이 주먹으로 종인의 가슴팍을 퍽 쳤다. 저보다 덩치 큰 녀석들 사이에서 귀염이나 받을 것처럼 생긴 주제에 백현은 근처에서 주먹으로 알아주는 놈이었다. 겉보기에는 순한 강아지처럼 생겼으나 백현은 저보다 덩치 큰 녀석들에게 둘러싸여도 절대 기죽는 법이 없었다. 게다가 싸울 때만큼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주먹을 휘둘렀기 때문에 또래보다 덩치도 작고 생긴 것도 순하다고 해서 첫인상에 만만하게 본 순간 골로 가기 십상이었다. 상대에게 자신을 과시하느라 시시껄렁한 온갖 짓을 하는 녀석들 사이에서 종인이 드물게 마음에 들어 하는 녀석 중 하나였다. 종인은 가끔 변백현만 아니었으면 옆 동네까지 제가 먹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곤 했다. "그래서 넌 아니라고?" "난 너 같은 거 상대할 시간 없어." 하…, 진짜. 여전히 못하는 소리가 없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전면전을 하면 했지 거짓말 할 놈은 아니었다. "그럼 누구지." "니가 갈아엎은 새끼들이 한 둘이여야지." 어디보자-. 생각을 되짚어보는 듯 백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쇠 파이프로 개 패듯이 패고 유리병으로 머리통 내리치고 등허리 부숴놓고 머리채 잡고 여기저기 끌고 다니고, 아, 너한테 이런 건 별 거 아니지? 웃긴 새끼, 오지랖이 넓은 것도 아니면서 못된 짓 했다고 패는 건 또 뭐야? 엄한 놈한테 칼빵했다고 패고 남의 후장 뚫렸는데 후장 뚫은 새끼 입원시키더니, 삥 뜯은 놈도 밟아? 어휴, 저도 착하지도 않으면서. 보자, 너 치정극에 많이 엮였던 거 같은데. 왜 들러붙는 년, 놈들 다 받아주는 거야. 난잡스러운 새끼. 그래놓고 귀찮게 한다고 버러지 취급에 팔, 다리 부러트려놓질 않나 이마도 찢어놓고 안 해본 짓이 없네, 없어.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을 쏟아낸 백현이 감탄스러운 듯 말했다. "와, 진-짜 못된 새끼다." "남 말하고 있네. 박찬열 만나기 전에는 개년이었던 주제에." "……." 아, 실수했다. 변백현은 박찬열 얘기만 나오면 사람이 달라지는데. 안 그래도 종인의 말이 거슬렸던 모양인지 생글거리던 백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내가 들은 얘기가 좀 있긴 한데." "뭔데." "말 안할래. 기분 상했어." "씨발년, 지금 나랑 장난 하냐?" 종인의 말에 표정이 사라진 백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올려다보는 눈빛이 당장이라도 저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은데 애써 참는 듯했다. "이 미친 새끼가 나한테 칼같이 구네." "……." "오세훈이 요새 너 정신 빠졌다고 존나 걱정하던데, 어디 엉뚱한데서 지랄이야." 백현의 입에서 나오는 낯익은 이름에 종인은 잠시 멈칫했다. 광적으로 정보를 수집해대는 놈이 얌전히 학교 안에 있는 것만 보고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저보다 먼저 백현을 만났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했다. "그래서, 들은 얘기가 뭔데." "흥미 있어?" "없을 리가." 종인의 대답에 백현이 다시 즐거운 듯 입가에 웃음기를 띠었다. "맨 입으로?" 은밀하게 시선을 마주친 백현이 작게 속삭였다. 이게 지금 나랑 거래를 하겠다, 이거지. 하여튼 겁도 없는 새끼다. 너 말야. 종인은 가까이 다가온 백현의 얼굴을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내가 니 얼굴 봐서 박찬열 살려준 거 알지." "……." "걔 목숨 나한테 빚진 거 알아, 몰라." "개새끼." "개새끼는 너고." 아오, 씨발 새끼. 쌍놈의 새끼. 상종 못할 새끼! 종인의 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백현이 성질을 내며 종인에게 욕을 퍼부었다. 싸울 때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사람처럼 날뛰어대는 변백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있다면 바로 누군가 박찬열에게 손찌검을 하는 일이었다. 박찬열로 말하자면 변백현과 같은 고등학교의 운동부 소속으로, 운동하는 녀석답게 예의가 몸에 배어있고 천성이 밝고 바른 놈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했기 때문에 박찬열이 가진 가장 큰 재산은 어렸을 때부터 잘 단련해 온 몸이었다. 그렇기에 찬열은 잘 모르는 녀석들과 섣불리 싸우려고 들지 않았다. 사실 누군가 악의를 가지고 달려들어 손가락이라도 날아가는 일 따위는 굳이 힘을 따지지 않더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사건이 끝난 후에는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때문에 처음 찬열과 사귀기 시작했을 때 백현은 그를 지키려고 내심 전전긍긍했었다. 종인이 보기에 박찬열은 변백현에게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었다. 당시에는 백현이 왜 그 상황이 화나는 게 아니라 무서운 일이라고 표현했는지 도무지 이해가지 않았었다. 저에게 퍼부어지는 욕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 종인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너 아직도 걔 앞에서 인격이 달라지냐?" 싸울 땐 미친 새끼처럼 날뛰는 주제에 백현은 박찬열 앞에만 가면 애완동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살랑거렸다. 세상에, 미친개 변백현이 애완견이라니. 박찬열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순한 동물을 자처하며 살갑게 구는 변백현을 봤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변백현의 시답지 않은 연기가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다면 박찬열은 여전히 그가 아주 조금 발랑 까진 고딩일 뿐, 이렇게 개같이 날뛰는 새끼라는 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아마 종인이 도와줬던 날, 저에게 달겨들었던 놈들이 변백현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어서 저를 친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겠지. 박찬열 앞에서 다른 인격이 되는 백현을 보고 난 후, 종인은 종종 넌 관 뚜껑 덮을 때까지 가면 쓰고 살아야겠다며 백현을 놀려먹었다. "남의 연애사는 네가 알 바 아니고." "여전한가보네." "이딴 식으로 속 긁어 댈 거면서, 왜 찾아왔냐?" 재수 없는 새끼야. 여전히 이를 득득 가는 백현의 말에 종인은 잠시 틈을 두었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여차하면 도와달라고." "……." "나한테 빚졌잖아." 사실 굳이 이럴 때에 도움을 바라고 도와준 건 아니었다. 그저 남의 구역에까지 와서 멀쩡한 운동부 새끼 인생 하나 조지려고 날뛰는 새끼들이 꼴사나웠을 뿐이었다. 맞부딪치는 구역에서 싸움일 일어날 때마다 으르렁 거리던 변백현이 그때 이후로 호의를 보인 것 때문에 박찬열과의 사이도 알았을 뿐이었다. 그때는 그 날고 긴다는 변백현이 박찬열한테 살살 기는 게 재밌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저, 변백현이 꽤나 피곤하게 산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도와달라는 종인의 말이 단번에 와 닿지 않아 백현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제 멋대로 사는 김종인이, 모두의 위에 군림할 줄만 알던 김종인이, 도와달란다. 백현이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야?" "뭐가." "좋아하는 놈 생겼다는 거." "……." 종인이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백현은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와…, 재밌네." 재밌네, 재밌어. 진짜 재밌다. 재밌다는 말만 몇 번이고 계속 중얼거리던 백현이 종인의 얼굴을 보며 짓궂게 웃었다. "잘 되고 싶으면 너야말로 관 뚜껑 덮을 때까지 가면이나 쓰지 그래?" "걘 내가 이런 놈인 거 알아." "이야, 잘 되긴 글렀네!" 종인의 대답에 신난 듯 백현이 박수를 짝! 소리가 나도록 쳤다. 아무래도 도경수와 잘 안되길 바라는 게 진심으로 느껴진다. 종인은 피곤한 시선으로 백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도와줄 거냐고." "하는 거 봐서." 다시 기세등등해진 백현이 화를 억누르는 종인의 얼굴을 보며 작게 킬킬댔다. 성급하기는. "니가 구역관리 제대로 안했으면 거기서부터 시작해야지." "너희 쪽에선 관심이 없다?" "니가 잘 못하면 내가 먹을 거긴 한데, 아직은 흥미 없어." 한동안 얼굴 안 보였다고 기세등등한 녀석들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신이 나서 저를 뒤집으려고 작당모의 하면서 아등바등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속이 뒤틀린다. 게다가 직접적으로 저를 친 게 아니었다. 비겁하게 도경수를 미끼삼았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를 않는다.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녀석들은 한 대 치면 열 배 이상으로 갚아주는 게 도리에 맞는 일이지. * * * 일정한 간격으로 나열되어있는 책장과 틈도 없이 빽빽하게 꽂혀있는 책 사이에 서있는 건 늘 경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강제된 고요함 속에서 책에 둘러 싸여 서 있으려면 지구가 굴러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도서실을 관리하는 학생 다음으로 이곳을 가장 많이 찾은 학생은 아마 제가 되지 않을까, 경수는 생각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 경수는 피곤할 정도로 부글부글 끓는 사내놈들의 혈기를 피해 도서실을 찾는 게 습관이었다. 점심시간은 다른 때보다 시간이 길었기에 책장 끝에서부터 눈길을 끄는 책들을 읽기 시작한 게 어느덧 책장의 1/3 정도를 지나왔다. 경수가 책을 고르는 기준은 늘 달랐다. 어떤 날은 제목이 눈에 띄어서, 어떤 날은 책 표지가 예뻐서, 또 어떤 날은 정말 아무런 이유 없이 끌려서. 그렇게 온갖 들쭉날쭉한 기준으로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올해는 준면이 부탁한 일 때문에 원예에 관한 책을 줄곧 틈틈이 읽었으나, 최근 필요한 지식은 모두 습득했기에 오늘은 다른 종류의 책을 읽을 생각이었다. 책 읽기를 멈춘 지점에 서서 경수는 책장의 첫 번째 칸을 바라보았다. 며칠 전부터 제목이 눈에 밟히던 책이 있었다. 멀리 있는 책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손끝이 책등을 스쳤다가 안타깝게 떨어졌다. 찾고 있던 책이 책장 맨 위에 꽂혀있는 걸 알았을 때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선뜻 손에 닿지 않아 애가 탄다. 하긴 저의 키로 맨 위에 있는, 그것도 까맣고 자그마한 책을 쉽게 꺼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의자라도 끌고 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불쑥 등 뒤에서 누군가 손을 뻗더니 꺼내려고 애쓰던 책을 쑥 꺼내갔다. 목표했던 책을 눈앞에서 채가는 걸 본 경수가 곤란한 표정으로 등 뒤를 돌아봤다. 불쑥 눈앞으로 내밀어지는 까만색 책 커버가 시야를 가렸다. 책을 쥔 단단한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더니 언제 온 것인지도 모르게 종인이 서있었다. "고마워." 얼굴을 확인하자 어쩐지 안도감이 들었다. 짧게 답한 경수는 종인이 제게 건넨 책을 받아들었다. "별에서 온 아이." 책 커버에 적힌 글자를 따라 읽는 종인의 입매가 부드러워 보이는 건, 저의 착각일까. "제목도 꼭 너 같아." "뭐…?" "네 눈동자 말이야." 의아한 듯 묻는 경수의 말에 종인이 가까이 다가가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꼭 우주 같잖아. 숨이 닿는다, 고 생각한 순간 나지막이 속삭이는 종인의 목소리가 눈두덩이 위로 흩어졌다. 한숨 같은 속삭임에 크게 눈을 떴더니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종인이 피식 웃었다. 온통 암흑을 집어삼킨 듯 새카만 눈동자가 세상의 모든 빛을 흡수한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시선을 마주치고 빤히 바라보던 종인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따뜻한 숨이 속눈썹을 가르고 눈꺼풀 위로 내려앉았다. 뺨에 닿은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온통 뜨거워,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 종인의 손을 마주 쥐었을 때였다. 말캉한 혀가 눈가를 핥더니 곧 눈동자로 침범해 들어왔다.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망막에 닿는 감각에 소름이 돋는다. "읏…." 예상치 못한 침범에 질끈,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그새 얼굴을 뗀 종인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하여튼, 변태새끼. 눈알을 핥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뭐하는 짓이야." "예뻐서." 눈앞에 있는 미친놈이 헛소리를 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닌데, 심장이 쑥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 "헛소리 좀 그만해." 애써 종인을 외면하며 경수는 책을 펼쳤다. 책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책장을 촤르륵 넘겼더니, 오랫동안 아무도 책을 찾지 않은 듯 미세한 먼지가 풀썩 피어올랐다. 종인은 제가 책을 보고 있다는 걸 신경 쓰지 않는 듯 손가락으로 끈질기게 귓바퀴를 만져대었다. 단단하게 여물은 손끝이 계속해서 한곳을 문질러대니 기분이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귀찮게 하지 마." "씹고 싶다." 입맛을 다시는 게 진심인 것처럼 보여 소름이 돋는다. 그새 얌전해졌나 싶었더니 역시 본성은 못 속이는 모양이었다. 귀찮은 손짓으로 슬쩍 밀어내려고 했으나 종인은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제야 이미 둘 사이게 틈도 없이 가깝다는 걸 깨닫는다. 방심한 사이에 경수는 이미 종인의 품안이었다. 도망가려고 해도 늦었다. "도경수." 그저 이름을 불렸을 뿐인데 발끝부터 소름이 타고 올랐다.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축축한 혀가 귓바퀴를 타고 들어왔다. 끈적하게 귀를 핥다가 곧 여린 살점을 잘근 씹었다. 무심코 들고 있던 책을 떨어트릴 뻔한 걸 가까스로 추슬렀다. 품안에 갇힌 채 가슴팍을 밀어내려고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고막을 때려대는 심장소리에 귀가 멀 지경이다. 지나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 탓에 대체 누구의 심장이 이렇게까지 뛰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기분에 괴로워하며 경수는 나지막이 신음했다. 손끝으로 괴롭힐 때부터 잔뜩 예민해진 탓에 여린 살점이 씹히는 감각이 더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제발, 그만 좀…." 거부하는 목소리는 종인이 입을 맞춰와 사라지고 말았다. 급박하게 다리가 얽히고 조금의 틈도 없이 몸이 밀착되었다. 다급하게 입술을 벌린 종인이 더 깊이 들어왔다. 헐떡이는 숨소리마저 새어나가는 걸 용납할 수 없는 듯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격렬한 키스였다. 아슬아슬하게 손에 들려있던 책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낡은 마룻바닥 위로 떨어져 내렸다. 짐승이다. 제 위에 있는 이 남자는 강하고 피 냄새에 쉽게 흥분하며 오로지 순수하게 상대를 정복하는데 목적이 있는 짐승이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수컷의 체취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입술을 물어뜯을 것처럼 키스를 하면서 종인은 셔츠 위로 손을 지분거렸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셔츠를 벗긴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관능적인 손놀림이었다. 틈도 없이 얽힌 허벅지 사이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페니스가 느껴졌다. 고통과 괴로움 사이로 흥분이 넘나들기 시작했다. "하지, 마." 들어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가까스로 거부의 말을 했다. 거부하는 목소리가 헐떡이는 숨소리 탓에 희미하게만 들렸다. 타액에 젖은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온몸을 범할 것처럼 적나라하게 울렸다. 작고 동그란 경수의 어깨를 움켜쥔 종인이 가느다란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청량한 내음새가 코끝을 마비시킬 것처럼 훅 끼쳤다. 전부 다 들이키고 싶다. 전부 다 제 것으로 만들고 싶다. 당장이라도 어떻게든 해버리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혹시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좀 더 확실하게 완벽하게 소유하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억지로 할 수도 있었다. 장소가 학교라고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역시, 내키지를 않는다. 그렇게 되면 저를 떠보기 위해 강간치려고 했던 녀석들이랑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그런 것 따위엔 이미 관심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자그마한 어깨를 부술 것처럼 꽉 쥔 종인이 몸을 떼어내었다. 제 말에 가까스로 몸을 떼어내는 게 신기해 경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앞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종인이 반듯한 이마 위에 쪽, 소리가 나도록 짧게 입을 맞췄다. "제발." 종인이 쓰지 않을 것 같은 절박한 단어에 숨마저 멈추게 된다. "몸조심해." "……." "내 거니까 함부로 상처내면 안 돼." 제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 제멋대로 소유를 주장한다. 언제고 멋대로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김종인.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에 같이 휩쓸려 버릴 것만 같아 두렵다. "말했잖아. 네가 잘 하라고." "……." "두 번 말하는 거 싫어." 대수롭지 않은 듯 피식 웃어넘기는 경수를 보며 종인은 문득 생각했다. 무서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소한 감정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할 수가 없다.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쌈박질을 하고 다닌 탓에, 보통 사람이라면 두려움을 느낄 상황들을 종인은 꽤 여러 번 겪었다. 제가 인정사정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만큼 상대도 저에게 거칠게 대했기 때문에 판을 크게 키우려 부러 도발한 적도 많았다. 맹수의 무리에 군림하는 자리는 제가 짓밟은 이들의 피로 이루어졌다. 그동안의 종인은 거의 목숨을 내놓고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숱한 싸움판을 거치면서 오락가락 하게 되는 때가 있어도 종인은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 제가, 지금,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말이 없는 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도경수를 보면서 종인은 백현을 떠올렸다. 박찬열이 저 때문에 험한 일을 당할까봐 두렵다고 얘기하던 변백현을. "내가." 차분히 시선을 맞추고 말을 기다리는 경수를 보며 종인은 겨우 입술을 떼었다. 무슨 말을 꺼낼 지 인내하며 저를 바라보는 도경수에게 차마 무섭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 밖으로 기어 나오려는 말을 꾸역꾸역 속으로 집어삼키며 종인은 말했다. "대체 널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게 있어, 아무리 애를 써도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변백현이 박찬열을 지키려고 전전긍긍해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없어 시야에서 놓치게 되는 것처럼, 세상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우연히 박찬열을 보고 제가 도와준 것은 그저 모두에게 운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런 기가 막힌 운 같은 건 세상에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세상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무슨 일에 처해있는지도 모르고 희희낙락하는 좆같은 일들이 널리고 널렸다. 저 때문에 도경수가 표적이 된 것을 알게 된 이후였다. 단도리 잘 하라는 세훈에게 도경수는 그렇게 약한 놈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였다. "약한 놈 아니니까 더욱 조심해야지." 세훈의 말이 선뜻 와 닿지 않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세훈이 저를 비웃으며 말했다. "너 없을 때 재수 없는 일 당하면 도경수 기분이 어떨 거 같아?" "……." "다른 사람 손도 타본 적 없는데 억지로 당한다, 라. 그 자존심 센 놈이 그 상황을 견딜 수 있을 거 같아?" "그렇게 약해빠진 놈 아니…." "그저 약한 놈이라면 외부의 압력에 휘어지고 말텐데." "……." "도경수는 단단해서 그대로 부러질 놈이야." 너한테 반응했던 걸 생각해봐. 덧붙이는 세훈의 말에 종인이 멍하니 가만히 서있었더니 세훈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실은 너, 도경수를 망가트리고 싶은 게 아니잖아." "……." "예뻐해 주고 싶은 것뿐이지." 아무리 도경수가 단단하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면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런 모든 일들이 모두 처음이라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숨 막히는 침묵이 둘 사이를 갈랐다. 여전히 제 어깨에 손을 얹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는 종인을 빤히 바라보던 경수가, 종인의 넥타이를 휘어잡았다. 넥타이를 잡아끄는 손길에 종인이 얼결에 끌려가자 귓가에 경수가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말했지. 잘 하면 예뻐해 준다고." "……." "두 번 말하는 거 싫으니까 잘 들어." 속삭이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마음에 들면." 도경수가 내뱉는 한마디의 말에 온통 신경을 집중한다. 공기 중을 부유하는 먼지소리 마저 들릴 듯 하고, 지구가 돌아가는 시간마저 느껴질 정도로 찰나의 시간이 무디게 흐른다. "오빠가-" 도경수의 입에서 나올 것 같지 않은 단어가 종인의 귀를 관통했다. "뿅 가게 해줄게." 종인이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는 사이 웃음소리 섞인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작게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사랑스러웠다. * * * 하교시간이 한참 지난 학교 앞 버스정류장은 언제 온갖 학교의 학생들로 복작거렸냐는 듯 고요하고 한산했다. 원채 혼잡한 시간대를 피해 하교하던 경수였으나 오늘은 평소보다 더 늦은 시간에 학교를 나왔다. 손목 끝까지 단정하게 단추를 채우던 소매가 짧아지고 가느다란 팔뚝이 태양 아래 무방비하게 드러나는 계절이었다. 연일 부족하지 않게 내리쬐는 햇살 때문인지 최근 경수가 돌보는 화초들은 점점 더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가끔 이상기후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낮의 온도가 올라가는 때에는 화초가 시들어버리는 건 아닐까 불안한 생각까지 들 정도였기 때문에 요 근래에는 방과 후에도 화단을 돌보느라 안 그래도 늦은 하교시간이 더욱 늦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히 동경하는 선배의 부탁으로 시작했는데 이제 준면보다 제가 더욱 열성적으로 돌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선배가 바란 건, 제가 무언가에 열성을 다하는 것이었을까. 막연하게 준면의 의도를 짐작해보지만 확실한 건 없었다. 파릇하게 돋아난 생명들이 꽃과 열매를 맺고 결국은 져버리고 난 후에, 저에게 남는 건 무엇일까. 생각에 빠져있느라 주변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경수는 어깨를 감싸 안는 손길에 그제야 누군가 제 옆에 다가왔다는 걸 깨달았다. 저보다 한참이나 큰 남자와 살집이 두툼한 남자 둘이 양쪽에서 친근한 사이인 것처럼 어깨를 꽉 쥐어와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문득 제발 몸조심하라고 했던 김종인이 떠올랐다. 정말이지, 너 때문에 나에게 없어도 될 일들만 생겨. 뒤틀리고 바스러진 세계의 파편들이 유리조각처럼 밟힌다. "얌전히 따라와." 속삭이는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지금 당장 이 둘을 뿌리치고 집까지 뛰어가는 건 어떨까 생각해봤다. 경수는 버스 정류장에서 가깝지도 않지만 멀지도 않은 집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왜 김종인이 굳이 저를 집까지 데려다줬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점점 더 어깨를 조여 오는 손길이 아팠다. 옴짝달싹도 못하게 협박하면서 얌전히 따라오란다고 따라가 줄 생각은 없었다. 어깨를 쥔 손아귀에서 억지로 벗어났더니 생각지 못한 반항이었던 듯 낯선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곧바로 손목을 붙들려 그대로 비틀고, 등 뒤에서 버둥거리는 몸을 붙잡기에 팔뚝으로 상대를 가격했다. "이게, 진짜!" 지치지 않고 악다구니가 계속 되자 손목을 붙들고 있던 남자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을 확 치켜들었다. 맞는다, 번뜩 생각이 들었으나 눈을 감는 대신 입술을 깨물고 오히려 더 똑바로 노려봤다. "하지 마."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내리치지 못한 손이 허공에서 분노를 참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처음 보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김종인은 대체 어디까지 들쑤시고 다닌 걸까. 좁고 한정된 저의 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종인의 세계를 새삼스레 깨닫는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고개를 내밀어 경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자구마한 체구와 하얀 얼굴에 살짝 쳐진 눈매가 어딘지 모르게 순한 인상을 주었다. "성격 있구나, 너." 살짝 내려앉은 눈매가 웃음기를 머금고 접어들었다. 호의를 담은 웃음과 달리 하얗고 작은 손이 경수의 왼쪽 뺨을 툭툭 쳤다. "피부도 좋고." "……." "손가락도 예쁜데." 부러지면 속상하겠지? 백현은 흔들림 없이 저를 바라보는 경수의 조그만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명백한 협박이었는데 도경수는 서운할 정도로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와, 눈도 예뻐." 못 보게 되면 안타까울 거야. 그렇지? 손바닥으로 저를 노려보는 눈동자 위를 덮으며 백현이 속삭였다. 아무리 겁을 줘 봐도 제 말을 듣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도통 반응이 없다. 흔들리는 척이라도 해주면 안 되나. 허공에다 대고 혼자 떠들어도 이것보다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거, 참. 백현이 곤란한 듯 고개를 젓더니 이내 경수의 머리채를 쥐고 뒤로 잡아당겼다. 읏…. 얼결에 고개가 뒤로 꺾여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을 하면 반응이 있어야지. 응? 내가 지금 얘기하잖아." 나지막이 으르렁거리던 백현은 뺨에 퉷, 침을 뱉는 도경수때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등 뒤에서 둘을 관망하던 이들이 놀란 듯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뜬 백현은 손을 더듬어 제 뺨을 만졌다. 질척한 침 덩이가 손가락 끝에 끈적하게 묻어났다. 하…. 백현이 짧게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경수를 바라보았다. 경수가 지지 않고 백현을 마주보며 싱긋 웃었다. "됐냐?" 덤덤하게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는 도경수를 보면서 백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한 번 터진 웃음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평소처럼 개같이 화를 내면서 당장이라도 눈앞의 도경수에게 주먹을 휘두를 거라 생각했던 이들은 예상이 빗나간 탓에 벙 찐 얼굴로 서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백현은 허리를 꺾어 웃다 못해 시멘바닥에 주저앉아 끅끅거리기까지 했다. "바닥 기면서 뭐하냐." "왔어, 자기야?" 등 뒤에서 빈정거리는 종인의 목소리에 한참을 낄낄거리던 백현이 반색하며 말했다. 뭐래, 이 미친년이. 백현이 저를 부르는 호칭에 종인이 소름끼치는 표정을 지었다가 건너편에 있는 경수를 발견했다. 그제야 변백현이 저를 엿 먹이려고 일부러 시답지 않은 호칭으로 부르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이미 종인을 바라보는 경수의 표정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경멸하듯이 종인을 바라보는 것에 백현이 더 신이 난 듯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니가 싫은가봐!" 아무래도 변백현은 김종인이 도경수랑 잘 안되길 바라는 게 맞았다. "말해봐." "뭘." "어디까지 갔어?" 도와주는 거고 뭐고, 얼굴에 당장이라도 주먹을 꽂아 넣을까 종인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물러설 기색이 없는 듯 백현이 계속해서 말했다. "천하의 김종인이 마음에 드는 놈 아다를 여태 안 땄을 리 없고, 변태 플레이는 안 했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종인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걸 보며 백현은 더 신이 났다. 저거 지금 좋아하는 놈 앞이라 성질 죽인다 이거지.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시선에 신이 난 백현은 빙글 뒤 돌아 도경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협박 할 때는 오히려 무신경하던 얼굴이 슬그머니 비틀려 있었다. 아, 이놈들 봐라? 재밌다, 재밌어. "어때. 이 새끼랑 할만 해? 만족스러워? 계속 붙어먹고 싶어?" "……." "오는 년, 놈 안 막고 가는 년, 놈 안 붙잡고. 참 대단도 하시지." "좀 닥쳐라." "난잡한 새끼." 종인의 목소리와 경수의 목소리가 들린 건 거의 동시였다. 백현은 종인을 향해 빈정거리는 도경수를 멍하니 바라봤다가 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아, 걸작이다! "나 얘 마음에 들어!" 경수는 저에게 손가락질 하는 백현을 어처구니없는 듯 바라보았다. 막무가내로 똘마니들 시켜서 억지로 끌고 오게 만들더니 되먹지도 않은 협박을 했다가 알고 싶지 않은 김종인의 사생활이나 까발리고 그래놓고 한다는 말이 제가 마음에 든단다. 뭐야, 이 미친 새끼는. 진짜 끼리끼리 논다고 김종인 주변에는 정신머리가 이상한 놈들만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만나자더니 왜 여기까지 와서 개수작이야." 종인의 말에 주머니에 손을 꽂고 비딱하게 선 백현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잘못 도와주면 나도 피 볼 수 있는데, 좀 알아야하지 않겠어. 도와줄만 한지 아닌지,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안 그래?" "그래서, 애꿎은 도경수까지 끌고 왔다?" "니가 박찬열로 협박했다고 내가 그냥 예예 하면서 넘어갈 줄 알았냐." 날 너무 쉽게 보네, 서운하게시리. 말을 덧붙이면서 백현이 힐끔 도경수를 바라보았다. 천하의 김종인이 반한 놈이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백현은 여전히 저를 불쾌한 듯 바라보는 도경수를 마주보았다. "얘 마음에 들어." 여전히 저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백현에 경수는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이야기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제가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끌려왔다는 것쯤은 잘 알겠다. 그동안 제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은 대부분 예측 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제 아무것도 예상할 수가 없다. 모든 질서가 죄다 흐트러진다. 정말 엉망진창이다. "이제 얘기 좀 해볼까." 오세훈도 불러. 백현이 손가락을 들어 전화기 모양을 만들며 말했다. 귀에 걸리는 낯설지 않은 이름에 경수는 무심코 종인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종인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물어버렸다. 조금 전 백현이 가감 없이 쏟아낸 말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신경 쓰였으나, 종인은 살아오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설명이나 설득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방금 도경수에게 그런 게 아니야, 라고 말 할 뻔했다. 백현이 말한 것들이 사실에서 빗겨난 것들이 아님에도 무언가 설명하고 설득하고 싶어졌다. 낯설고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선배랑 약속 있어." "……." 할 말 있으면 빨리 하라는 의도로 말을 던졌으나, 종인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경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종인의 표정에 제 기분마저 혼란스러워진다. "간다." 결국 경수가 체념하고 돌아설 때까지 종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변백현이 도경수의 등 뒤에다 대고 다음에 또 봐~ 하며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 * * 날씨가 본격적으로 여름으로 접어들고 학기가 지나가면서 경수는 최근 학교에서조차 준면을 만나기 쉽지 않았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올해가 다 지나고 나면, 준면은 졸업을 해서 학교를 떠나게 될 것이다. 어른이 되어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선배를 생각하고 있으려면 어쩐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확신할 순 없지만 이 이상한 마음은 아무래도 서운함인 것 같았다. 저로서는 낯선 감정이었으나, 선배는 짧지 않은 도경수의 인생에서 최초로 마음을 움직여 다가간 사람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준면이 저에게 주고 간 화단은 오로지 저만의 세계가 되어버렸다. 경수는 아직도 준면이 저에게 화단을 가꾸게 한 의도를 오롯이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막연하게 마음 한구석에서 선배가 저에게 나쁜 뜻으로 일을 시키지는 않았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제 막 여름 초입인데 저녁에도 불어오는 바람이 후덥지근했다. 서점에서 준면을 만나 그간 못했던 얘기를 짧게 하고 헤어져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에 점점이 주홍빛 가로등이 빛났다. 미지근한 바람을 타고 머리카락이 이마를 간질여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다가, 파란 대문 앞에 잘 빠진 새까만 바이크가 서있는 걸 발견했다. 인기척을 느낀 듯 바이크에 기대 앉아있던 종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둠을 닮은, 까맣게 빛나는 맹수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다. 몇 발자국 떨어진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경수는 종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먼저 다가가지 않을 거야. 네가 와. 속으로 생각하는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종인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모든 짐승을 호령하는 맹수의 왕처럼 여유롭지만 압도적인 몸짓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코앞까지 다가온 종인이 말했다. 언제부터 기다렸는데? 묻고 싶었으나 어쩐지 낯간지러운 생각이 들어 도로 목구멍 속으로 말을 집어넣는다. 언제부터인가 종인은 제 앞에서 본성을 숨긴 채 순한 동물인 양 행동했다. 축 쳐진 귀를 하고 꼬리를 내린 채 살랑거리는 것 같았다. 김종인이 그러하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겠지. 저 외에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행동이라고 생각하니 그건 나름대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저도 종인에게 그러할까. 낯선 감정과 행동들에 몸서리치던 걸 생각하며 경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김종인은 결국 제가 가진 세계를 파괴할 뿐 아니라 아예 재조립하고 있었다. "낮에는 미안." 입안에서 굴러지는 낯선 어감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괜찮아. 잊었어." "변백현이랑은 그런 사이 아니야." "……알아." 낮에 봤던 백현을 떠올리며 경수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저와 김종인을 사이에 두고 재밌어서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게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거칠긴 해도 나쁜 놈은 아냐." "니가 말하니까 별로 믿음이 안 간다." 툭 던지는 경수의 말에 종인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가. 수긍하는 종인의 목소리가 담담해 경수는 고개를 들어 어둠에 묻힌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하늘에 빛나는 별만큼이나 저를 내려다보는 눈동자에서 빛이 난다. 어쩐지 답지 않게 눈빛이 순해서 기분이 좋아진다. 위험한 짐승인 걸 알면서도 어쩐지 이 눈빛에 속고 싶어졌다. "들어갈래?" 귓가에 속삭이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아쉬운 듯 느껴지는 건 저의 착각일까. 경수는 손을 들어 얌전히 서있는 종인의 목 뒤로 둘렀다. 항상 종인이 먼저 허리를 숙여 잘 느끼지 못했는데 생각보다 키 차이가 더 났다. 슬쩍 발뒤꿈치를 들고 목덜미를 끌어 당겨 경수가 먼저 종인의 입술에 키스했다. 말캉한 살덩이가 따뜻한 숨과 함께 맞닿았다. 쪽, 소리가 나도록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낯간지러운 기운이 발끝을 타고 올랐다. "조심해서 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종인이 미처 저를 잡기도 전에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파란 문을 닫고 기대선 후에야 놀란 듯 얼빠진 얼굴로 서있던 종인의 얼굴이 떠올라 그제야 웃음이 터졌다. 대문에 기대앉아 실없는 사람처럼 경수는 한참을 혼자 웃었다. 네가 내 세상을 바꿔도, 결국 길들이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 * * 쇠파이프가 공중을 가르면서 일으키는 바람을 따라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진다. 공중에서 춤을 추듯 움직이는 쇠파이프가 상대에게 정확히 맞아 들면서 살덩이와 마찰되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경쾌했다. 치고 빠졌다가 모래 바닥에 발을 디디면 풀썩 피어오르는 먼지가 후텁지근하게 후각을 마비시켰다. 상대를 제압할 때 가장 중요한 순간이 있다면 그건 폭력을 휘두르는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이었다. 주먹을 뻗어 닿을 거리는 아니지만 시선이 마주치고 서로의 기를 가늠할 때. 여기서 밀리면 그전에 아무리 우세했다고 해도 전세는 뒤집힐 수 있다. 짧게 휘파람을 불며 종인은 비틀거리는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머리통 한쪽이 터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피가 줄줄 새는 얼굴을 제가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즐거워진다. 폭력을 휘두를 때의 종인은 가장 순수한 상태라고 봐도 좋았다. 본디 짐승은 본능적인 데가 있는 법이었다. 눈앞을 선명하게 물들이는 붉은색이 흥분을 돋운다. "나 없는 동안 재밌었어?" 자신의 만족을 위해 매일같이 쌈박질을 하고 다니던 때도 있었다. 과시를 위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본능적으로 강한 수컷에게 이끌리듯 종인의 주변에는 온갖 짐승들이 꼬여들었고 종인은 본의 아니게 자신만의 무리를 형성했다. 그러나 강렬한 수컷의 힘에 이끌려 왔듯이 그들은 종인이 얌전해졌다는 소리가 퍼지자마자 가벼운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싶어 안달을 냈다. 그동안 누군가 저를 열렬하게 따르거나 혹은 맹렬하게 질투를 한다 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던 종인이었으나, 그들이 저에게 위협을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무엇보다 저를 협박하기 위해서 건드린 게 도경수라서 더 기분이 나빠진 것도 사실이고. "내가 잠시 한눈팔았다고 바로 이렇게 날뛰면 어떡해. 응?" 아무래도 벌벌 떨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기 싸움을 할 필요도 없이 전세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기에서 밀리고 육체적으로도 결국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 반응은 두 가지였다. 무릎 꿇고 결국 굴복하거나, 혹은 죽자고 달려드는 것. "으아아아!" 나름 사기충전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종인이 듣기엔 곧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거리가 가까울 때 길이가 긴 쇠파이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버리고 빠르게 몸을 낮춘 후 주먹을 쥔 상태에서 정확하게 상대의 얼굴을 가격했다. 마치 톱니바퀴의 날이 맞물리는 것처럼 정확한 동작의 연속이었다. 입안에서 팍 터진 핏물이 허공으로 반짝거리면서 흩뿌려졌다가 곧 모래바닥에 진하게 스며들었다.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사방에서 뒤엉키고 맞부딪치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렸다. 패거리 싸움은 어차피 윗대가리 싸움에 따라 거의 다 결론이 나왔다고 봐도 좋았다. 끝난 것 같다. 흙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얼굴을 잘근잘근 밟았더니 아직 살만한 듯 나지막한 신음소리가 그릉거리며 흘러나왔다. 몸이 상쾌할 정도로 가뿐했다. 다음은 어딜까. 여기저기 널브러져서 신음하는 녀석들을 보며 종인은 생각했다. 도와주긴 할 건데 발목 잡을 짓은 하지 말라던 백현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겁 대가리 없는 새끼. 기어오르는 말을 할 때마다 언제 한 번 싸움을 붙어보는 건 어떨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자존심상하게도 지금 이 상황은 변백현의 말대로 발목 잡힐 상황을 피하려고 싸우는 게 맞았다. 싸움판 크게 벌릴 거면 니 밑에 있는 놈들이나 먼저 잘 잡아야지. 빈정거리는 목소리를 떠올리니 속이 뒤틀린다. 그러나 누구나 속한 세계라는 게 있어, 자신을 감싸고 있는 세계가 돌아가는 룰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전초전이다. 제게 까불지 말라고 말하는. 변백현은 그렇다 치고- 지금 상황에서 종인이 가장 의외인 인물은 오세훈이었다. 소문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꺼낼 때는 나름 친구사이에 대한 예의정도로 생각했으나, 세훈이 직접 옆 동네까지 찾아간 건 직접적으로 사건에 개입하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부터 내 뒤도 열심히 캐고 다녔냐고 물었더니 옆에서 얌전히 듣던 변백현이 저를 정떨어지는 놈 보듯 하던 게 생각났다. 그렇지만 변백현은 오세훈을 몰랐다. 세훈은 자신이 관심 있는 사건이라면 모든 내용을 가장 정확히 알면서도 항상 변두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흥밋거리에 대해서는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게 파고들지만 결코 직접적인 개입은 하지 않는 게 세훈의 입장이었다. 애초에 종인의 행동이 폭력성을 만족시키는데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처럼, 세훈도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정보들을 공유하거나 사건에 직접적으로 말려드는 건 사양하는 편이었다. 그런 세훈이 자신보다 먼저 백현을 만나러 갔다는 게 종인의 입장에선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했다. "요즘처럼 다른데 정신 팔렸을 때가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 떼들이 몰려들 적기 아니겠어." "나라면 이럴 때 뒤통수를 치겠지." 세훈의 말에 백현이 맞장구를 쳤다. 변백현도 내심 저를 칠 생각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하고 싶어질 정도로 신이난 목소리였다. "나한테 계속 들려오는 얘기들도 있고." "너무 좋은 친구네. 김종인한테는 아까워." "그쪽에서 간 봤으니 이제 자꾸 치고 들어오려고 할 텐데-" "그럼 이쪽에서 먼저 나서줘야지. 그게 성질에 맞지 않겠어?" "변백현도 요새 심심한 거 같으니까 마침 잘됐어." 둘이 만담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죽이 잘 맞아 도저히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러니까 세훈의 말에 따르자면 의도는 순전히 저를 도와주려고 했다는 것뿐이었다. 명쾌한 말이었으나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아 미심쩍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 때 백현이 은근슬쩍 물었다. "주먹, 아직 쓸만해?" 너무 오래 쉬어서 녹슨 건 아닌가 몰라. 종인은 백현이 일부러 자존심 상할 말들만 골라서 하고 있는 걸 잘 알았다. 못된 새끼. "본성이 쉽게 어디 가는 건 아니지." "그럼-." 재밌는 일을 목전에 둔 어린아이처럼 백현이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가볍게 놀고 와." 여기저기 온갖 놈들이 나뒹구는 싸움판을 둘러보다가 종인은 무심코 손을 들어 입술을 훔쳤다. 좀 전에 제대로 주먹을 맞아서 터진 입술이 따끔거렸다. 손등으로 묻어난 새빨간 피를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바짓단에 대충 문질러 닦았다. 이전에는 폭력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던 기분이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듯 허전했다. 도경수가, 보고 싶었다. * * * 이제 막 여름으로 접어드는 날씨는 숨이 막히도록 텁텁한 습기를 동반했다. 피부에 닿는 공기마저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여름밤은 무더웠다. 여름 초입에도 이러한 날씨인데 앞으로는 얼마나 더 더울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더위에 약한 탓에 경수는 벌써부터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빨리 집에 들어가서 샤워라도 하고 싶은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할 때였다. 어둠을 밝히는 불빛은 저희 집이 있는 골목 어귀까지만 이어져있어 대문 앞은 해가 지고 난 후에는 늘 어두웠다. 담벼락 아래 어둠에 묻어 누군가 서있는 것을 멀리서 발견한 경수는 무심코 웃음이 나올 뻔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저를 집 앞에서 기다릴 사람은 한사람밖에 없었다. ㅡ김종인. 경수가 다가오는 걸 발견한 모양인지 어둠에 묻어있던 종인이 몸을 움직였다. 평소보다 발걸음을 늦춰 천천히 둘 사이의 거리를 좁혀 다가가다가 경수는 문득 무언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로 종인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붉게 터진 입술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그제야 얼굴 여기저기에 자잘하게 난 상처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발걸음을 멈출 뻔했다가 다시 거리를 좁혀 종인에게 다가갔다. 종인은 경수가 바로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꼼짝 않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칠흑 같은 눈동자가 고요히 저를 응시했다. 마치 그대로 삼켜버릴 듯 아득한 어둠이었다. 말없이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어쩐지 위로를 바라는 거 같아 손을 들어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손끝으로 따뜻한 피부가 느껴졌다. 터진 입술이 쓰라린 듯 종인이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경수는 종인에게 어쩌다 이렇게 다쳤는지 혹은 아픈 것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잦은 싸움과 그에 따른 상처들과 세력 다툼 같은 것들은 저에게는 평생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종인에게는 그저 일상일 뿐이란 걸 알고 있다. 때문에 가끔 저와는 판이하게 다른 세계의 일들이 침범해 들어와 원치 않는 흔적을 남기곤 했지만. "언제 왔어?" "조금 전에." 상처를 어루만지는 경수를 보며 종인이 답했다. 이전에는 피부가 찢겨도 육체적인 고통보다 그로 인해 감각이 살아난다고 느꼈다. 상대에게 폭력을 가하는 만큼 저에게도 닥쳐오는 거대한 폭력을 즐겼다. 그러나 쓰라린 상처를 쓰다듬는 손길에 아픔을 느낀다. 머릿속에서 가슴속에서 한가지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 마구 휘몰아쳤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도저히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 할 것 같다. "다음부턴 연락이라도" 하고 와- 말하려던 경수는 갑자기 종인이 몸을 끌어안는 탓이 말을 끝맺지 못했다. 심장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밀착한 몸에서 독특한 살 냄새와 함께 희미한 먼지 냄새에 뒤섞여 짙은 피 냄새가 났다. 야생의 짐승과 같은 날것의 내음새가 후각을 마비시킬 것 같다. 그제야 경수는 종인이 평소와 무엇이 다른지 깨달았다. 종인은 아직도 사냥의 감각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채 피 냄새에 취해있었다. 아니, 처음 저에게 다가왔던 종인을 생각하면 사실 이게 본모습이다. 한동안 얌전떠는 모습에 잊고 있었다. 입술을 겹치고 입안을 헤집는 혀 놀림이 다급했다. 뜨거운 혀가 얽히고 타액이 질척이는 소리가 귓가를 범했다. 숨을 모두 들이킬 것처럼 키스하던 종인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당장이라도 차근차근 먹힐 것만 같다. 얇은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엉덩이를 쥐었다. 다분히 성적인 손길에 발끝부터 저릿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치솟았다. "흐읏…. 하지, 마." 받아들여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거부의 말을 해본다. "지난번에 먼저 키스한 건 어느 정도 허락한 거 아니야?" 미친놈이 또 제멋대로 해석하고 있다. 경수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 종인은 목덜미의 여린 살점을 씹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미친놈과 함께 있다가 같이 미친 게 분명했다. 재조립 된 세계 위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너 손장난 해본 적 없지."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에도 자잘하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온몸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자그마한 엉덩이를 쥐고 주무르던 손이 바지 앞섶을 쥐었다. "니가 내 생각 하면서-" 두께감 있는 청바지도 개의치 않고 경수의 것을 쥔 종인이 여리고 민감한 부분들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자위했으면 좋겠다." 하…. 한숨처럼 신음이 터졌다. 아무리 어둠속이라고 해도 집 앞이고 누구든 지나가다 볼 수 있는 골목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두려움과 동시에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로 흥분이 치솟았다. 애써 다리사이를 오므리려고 하자 종인이 허벅지를 끼워 넣고 작게 웃었다. "쌀 때 내 이름 불렀으면 좋겠어." 걸러지지 않은 저속한 말이 전신을 관통했다. 경수는 참지 못하고 종인의 가슴팍을 치면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경수는 종인의 품안에 축 늘어진 채 바튼 숨을 몰아쉬었다. 제 손으로 더럽혀지고 흐트러진 모습에 더 흥분된다. 더 흐트러트리고 싶다. 더 더럽히고 싶다. 더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 "미친놈아, 집 앞에서!" "난 어디든 상관없어." 잘라 말하는 종인의 목소리에 경수가 정말 짐승 취급하듯이 저를 바라보았다. 그런 시선에 더 흥분하는 걸 이젠 알 법도 한데, 여전히 도경수는 한결같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끝까지도 갈 수 있어." 폭력으로 치솟은 고양감을 그대로 도경수한테 섹스로 풀 수도 있었다. 어차피 저에게 폭력이나 섹스나 상대를 정복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상상만 해도 소름 돋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역시, 거기까지였다. 도경수는 어느 순간 제 안에서 그 이상을 넘어가버렸다. 너니까 참는 거야. 생각한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정신 나간 새끼." 원래 이런 놈인 걸 알고 있었으면서 깜빡 잊을 뻔했다. 들어갈래.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경수가 말했다. 안 그래도 더위 때문에 찝찝했는데 몸이 더 엉망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뒤돌아서 들어가려고 했더니 종인이 손목을 낚아채듯 붙들어 매었다. 뿌리쳐야할까. 잠시 고민하는 사이 잡아당기는 악력에 이끌려 다시 품안에 안겨버렸다. "밀어내지 마." "……." "내가 잘할 거야." "……." "날파리도 안 꼬이게 하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더니 그새 또 순한 양 행세를 한다. 경수는 지금 이 순간 종인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도 날" 넌 정말 종잡을 수가 없어. "좋아해줘." * * * 강제된 교칙 속에서 시침과 초침이 정오를 가리키는 순간은 교내에 있는 모든 이들이 가장 바라는 시간이었다. 수업이 끝마치자마자 온 교실이 들끓기 시작한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내자식들 사이에서 언젠가 저질렀던 일탈이 과장되어 흘러나오고, 뿌듯하게 채운 몸을 움직여 모래 먼지를 마시러 운동장으로 달려 나간다. 고작 한시간정도일 뿐이지만 감질 맛 나는 쉬는 시간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기에 순간에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 많은 사건들 중에는 도경수가 김종인을 만난 것도 포함되었다. 혹은 김종인이 도경수를 찾아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김종인을 알게 된 이후로 학교는 어디든 위험한 장소가 되었다. 운동장과 화단, 복도, 교실, 하다못해 저의 도피처였던 도서실조차 위험했다. 점심시간에는 늘 소란스러움을 피해 도서실을 가는 게 습관이었고, 오늘도 여느 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제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면 저의 동선이 이미 김종인에게 모두 간파 당했다는 것과 그로인해 여태껏 해왔던 모든 습관적이고 규칙적인 행동들에 변칙적인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미처 도서실에 가기도 전에 불쑥 나타난 종인에 의해 영상실로 끌려왔다. 그렇게 김종인을 겪어놓고도 전혀 예상치 못해 경수는 스스로에게 한심한 기분마저 느꼈다. 아니, 억지로 끌려온 것인지 아니면 그저 손에 이끌려온 것인지 이제 분간도 가질 않는다. 짙은 색의 두툼한 암막커튼을 쳐놓은 탓에 영상실 안은 유독 어두웠다. 희미한 빛에 의지해 앞에 서 있는 김종인을 바라본다. 거대하고 굶주린 맹수 같은 눈빛에 당장이라도 먹힐 것만 같다.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뭐야." "키스하고 싶어." 귀찮은 듯 물었더니 바로 답이 들려왔다. 그렇다고 이런 데까지 끌고 들어올 필욘 없잖아. 자주 사용하지 않는데다 늘 암막커튼이 쳐져있어 환기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탓에 공기가 텁텁했다. 숨 막힐 것 같다. 밀폐된 공간의 공기도 그리고 또 저를 바라보는 지독한 시선도. 거부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 답을 들을 새도 없이 말을 끝낸 종인이 바로 입을 맞춰왔다. 반응 없이 가만히 있기만 했더니 끈질기게 입술을 핥는다. 톡톡, 열어달라는 듯 혀로 두들기는 걸 모르는 척 하다가 어깨를 어루만지는 손길에 못이기는 척 입술을 벌렸다.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하고 들어온 것과 달리 벌린 입술 새로 들어온 혀는 다급할 정도로 난폭하게 입안을 휘저었다. 내쉬는 숨을 모두 삼켜버릴 듯하다. 오늘은 좀 애가 타는 눈빛으로 말하는가 싶더니 그새 키스하면서 앞섶을 주무른다. 손이 나오는데 거침이 없다. 하지, 마. 가까스로 입술을 떼고 말했으나 또 다시 늦었다는 것만 깨닫는다. 김종인이 하는 행동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틈도 없이 몰아붙여서 진저리를 치는가 싶으면 어느새 예뻐해 달라며 꼬리를 내리고 살랑살랑 흔들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제멋대로 몸을 주무르고선 좋아해달라고 애원한다. 순종적인 듯 굴어서 방심하면 그새 저를 쥐고 마음대로 뒤흔들어 댔다. 거부하기도 전에 버클을 푸르고 바지 속으로 손이 침범해 들어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미친 새끼야, 하지, 말라고." 악력차이를 알면서도 매번 반항하는 건 엄청난 힘을 소모했다. "쉿…. 걱정 마. 처음만 어려운거야." 제 말을 듣기는 한 걸까. 도대체 말을 들어먹을 기미가 보이지를 않는다. 단단한 손마디가 얇은 속옷 위로 제 것을 쥐고 무자비하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예민한 곳으로 단번에 열이 몰렸다.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어보지만 이미 발끝에서부터 잔뜩 힘이 들어갔다. 손을 들어 종인을 밀어내려고 해보았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종인이 몸을 밀어붙이는 사이 교내 방송이 나오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바뀌었다.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학교인 탓에 스피커를 찢을 정도로 데시벨이 높은 음악이 간간히 나오기는 했으나, 금속성의 긁는 목소리에 이렇게까지 선동적인 노래는 처음이었다. Babble, Babble, Bitch, Bitch, Rebel, Rebel, Party, Party, Sex, sex, sex, don’t forget the violence. 단편적으로 들리는 직설적인 단어에 흥분한 사내놈들이 여기저기 낄낄대면서 웃는 목소리가 복도 너머로 아득하게 들렸다. 고막을 터트릴 듯 교실을 뒤흔드는 노래 소리가 어지럽다. "넣고 싶어." 스피커에서 미친 노래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와 머리가 이상해질 지경이다. Do we need it? NO! Do we want it? YEAH! 종인이 알지도 못하는 노랫말을 웅얼거리듯 따라 부르며 잘근잘근 귓불을 깨물었다. 흐, 읏. 흣…. 브리프위에서 춤추듯이 움직이는 손길에 온몸의 세포가 어쩔 수 없이 민감하게 반응해버린다. 속옷 벗기고 싶어. 네 거 만지고 싶다. 여기- 사이에 손가락 집어넣고 싶어. 어느새 바지 앞섶에서 뒤로 손을 옮긴 종인이 얇은 속옷을 사이에 두고 엉덩이 골을 지분거렸다. 생각하는 대로 일일이 말하는 걸 다 듣고 있으려니 속삭이는 목소리만으로도 온몸이 범해지는 기분이다. 더 이상 신음을 참을 수 없게 되었을 때에야 종인이 손을 빼냈다. 안도한 것도 잠시, 종인은 경수의 손을 쥐고 바지 속으로 이끌었다. "내 생각 하면서 만져." 대체 뻔뻔하게 이런 주문할 수 있는 놈의 정신구조는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습한 공기와 폐부를 채울 것만 같은 먼지, 틈도 없이 밀착한 녀석에게서 훅 끼치는 희미한 땀 냄새까지- 청결하지 않은 모든 것들이 온몸을 뒤덮는다. "흣…. 제발." 저도 모르게 그만 두라고 애원하게 된다. 고막을 터트릴 듯 울리는 음악소리에 묻어 못들은 척 종인은 경수가 손을 움직이도록 종용했다. 한 번도 쥐고 흔들어본 적 없는 것이 마치 타인의 살덩이처럼 느껴졌다. 억지로 페니스를 쥐게 만들고 종인이 손을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페니스를 쥐고 있는 건 제 손이지만 종인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속절없이 이끌려 움직였다. 자그마한 손바닥에 민감한 표피가 쓸리고 비벼지면서 자극을 받았다. 손 안에서 질량감을 가지고 부풀어 오르는 게 고스란히 느껴진다. 흐, 으, 흣…. 제발, 하악. 허벅지 근육이 잔뜩 긴장할 정도로 다리가 온통 후들거렸다. 같이 손을 움직이면서 종인의 숨도 거칠어졌다. "경수야, 갈 거 같아…? 응?" 도경수―. 가까이서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오싹하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잡아먹히는 기분에 소름이 돋는다. 결국 종인에게 매달린 채 제 손 위로 파정하고 말았다. 흐으…. 끈적하고 나른한 여운이 감돌아 색색 숨을 몰아쉬었다. "쌀 때 내 이름 부르라니까." 퍼억. 끝까지 헛소리를 하는 종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제대로 맞아 들어간 듯 뻑 소리가 났으나 턱을 처맞고도 종인은 큭큭 웃는 게 다였다. 하여튼 미친 새끼. 상종 못할 놈이 분명했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실실거리고 있는 녀석을 지나쳐 영상실을 나왔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새에 노래가 끊겨있었다.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았는데도 방송이 더 이상 나오질 않는 걸 보니 누군가에게 제지를 당한 게 분명했다. 그런 미친 노래를 틀은 새끼는 또 누구람. 구석진 화장실로 들어가 손을 씻고 있으려니 종인이 쫓아 들어왔다. 씻는 내내 옆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게 귀찮기 짝이 없다. "꺼져. 피곤해." "어디가게." "화단." 대답했더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종인이 표정을 구겼다. "여전히 김준면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냐?" 선배를 함부로 말하는 게 귀에 거슬렸으나 대답할 가치도 없어 그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렇게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종인은 제 뒤를 쫓아왔다. 건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던 경수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새하얀 얼굴이 낯익어 무심코 발걸음을 멈췄다. 찬 기운이 느껴지는 새하얀 얼굴에 서늘한 눈매가 경수를 발견했다가 자연스럽게 뒤에 있는 종인을 향했다. "어디가?" 예상치 못하게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경수는 고개를 돌렸다. 종인이 낯익은 듯 낯선 얼굴을 향해 친숙하게 물었다. 옥상. 눈앞의 남자가 담배 피는 시늉을 하며 답했다. 조금 있다 갈게. 종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경수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다. "아는 사이야?" "어." 대수롭지 않게 흘러나오는 종인의 대답에 경수는 입을 꾹 다물고 생각을 더듬었다.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 갑자기 침묵하는 경수를 의아한 듯 종인이 바라보았다. "왜?" 생각을 더듬던 경수는 옆을 지나칠 때 저를 힐끗, 바라보던 가는 눈매에 퍼뜩 기억이 났다. "전에 만난 적 있어." "어디서?" "학생회실에서." "……누굴?" "방금 네 친구." 제 대답에 종인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오세훈이 거길 왜 가?" 되묻는 목소리에 그제야 선배가 살갑게 불렀던 이름이 똑똑히 기억났다. 종인의 의아한 표정에 경수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 "선약이 있다던데." * * * 뜨거운 햇살이 정오를 맞이해 그늘 하나 없는 옥상 위로 폭격처럼 쏟아져 내렸다. 시멘 바닥에서조차 열이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것 같은 한낮이었다. 깊게 담배를 빨아들였다가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으며 폐 속으로 연기가 고이는 기분을 음미한다. 오늘도 여전히 억지로 열리는 문이 끼기긱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저와 종인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곳임을 알기에 세훈은 굳이 뒤돌아보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구역정리는 잘 되가?" 운동장 위에서 여기저기 공을 쫓아 달리는 무리들을 내려다보며 세훈이 무심하게 물었다. 김종인은 굳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그가 움직일 때마다 따라오던 새끼들을 굳이 쳐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김종인이 도경수를 만난 후에 그의 곁으로 몰려들던 혈기왕성한 짐승들은 갈 데가 없어졌다. 딱하게도 말이지. 주인 잃은 강아지새끼들 마냥 소각장 구석에서 저들끼리 모여서 작당모의 하는 걸 보면서 세훈은 반쯤 태운 담배를 버렸다. 발로 불씨를 비벼 끄는 사이 종인이 제 옆에 와 섰다. 세훈은 최근 변백현이 들었다는 재밌는 소문의 정보를 알아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고등학교 와서 종인을 만난 건 저를 즐겁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었나 싶다. 김종인의 곁에 있으면 온통 흥미로운 일들이 넘쳐났다. 최근 종인이 속한 세계는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연일 싸움이 터지고 같은 구역 안에서 뿐 아니라 옆 동네까지 가세해서 정신이 없을 정도로 숨 가쁘게 돌아갔다. 김종인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시선을 모으는데 변백현이 같이 움직이는 통에 소문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다. 상황을 잘못 짚은 이들은 조만간 김종인과 변백현이 세기의 대결을 위해 조만간 붙을 거라는 얘기도 하고 다녔다. 그뿐이 아니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단 놈들이 틈을 타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함께 날뛰었다.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은 욕망이 드글드글 들끓기 시작하면서 같은 무리 속에서도 몇 번이고 패거리가 갈렸다. 대부분은 종인이 다시 승기를 잡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들을 미처 숨기지 못했다. 그러한 생각 중에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도경수였다. 김종인이 관심 있다는 도경수에 대한 소문은 이미 퍼질 대로 퍼졌다. 아침 조례시간에 김종인이 다짜고짜 도경수의 뺨을 내려친 건 이제 학교 내에서 뿐 아니라 밖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도경수는 원치 않겠지만 그는 이미 이쪽 세계에서 꽤나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기집애들이 너 애인 생겼다는 말에 실망 많이 하던데." 강한 힘에 이끌리는 건 사내놈들뿐이 아니었기에 종인의 주변에는 잠이라도 자고 싶어서 치대는 기집애들이 차고 넘쳤다. 그들 사이에서 종인은 누구든 딱히 거절하지 않으면서도 결정적으로는 아무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때문에 종인은 항상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지는 우성수컷으로 존재했다. 종인과 자고난 후에 시선 한 번 더 받아보려고 애를 쓰면서 좋아서 어쩔 줄 몰라서 절절 매는 기집애들도 여럿 있었으나 모두 종인의 관심을 받는 데는 실패했다. 어느 누구도 김종인의 관심을 가져갈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요새 다들 뭘 하는 줄 알아? 김종인이 애인이 있어도 다른 년, 놈들이랑 붙어먹을지 아닐지 내기하고 있다니까. 판이 꽤 커." 그간 아무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놈이 처음으로 관심을 갖는 상대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사건이 되었다. 때문에 이런 우스운 상황까지 벌어졌다는 게 세훈으로서는 재밌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들 너랑 자는데 자신감이 넘치는데, 넌 어때?" 모두의 예상이 더욱 빗나갈 걸 생각하면 더욱 즐거워진다.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리는 세훈을 대꾸 없이 줄곧 바라만 보던 종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너 김준면이랑 무슨 사이야?" "갑자기 또 무슨 헛소리야." 세훈은 종인이 이 상황에서 왜 갑자기 학생회장의 이름을 꺼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하고 있는 얘기는 학생회장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도경수가 봤다던데." "……." "학생회실은 뭐 하러 갔어?" 종인은 고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세훈을 알고 지냈다. 각자의 내밀한 성향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도 서로였고, 그때부터 줄곧 함께 붙어 다녔다.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히 드러내 보이지 않아도 김종인을 가장 잘 아는 건 오세훈이고 오세훈을 가장 잘 아는 건 바로 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종인은 처음으로 자신의 생각에 혼란이 왔다. 여태껏 그렇게 학생회장의 얘기를 하면서도 한 번도 그와 아는 사이일 거라고는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세훈이 전혀 티를 내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눈치 챌 만한 어떤 기회도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아직도 여전히 김준면의 손아귀에서 놀고 있단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기분이 불쾌해진다. "학생회장하고 만나면 뭐해? 떡이라도 치냐? 그 새끼가 잘해줘?" "그런 사이 아니야." "그럼?" 재차 물었더니 세훈이 가만히 있다가 씨익 웃었다. 찰그랑.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는 옥상 열쇠가 허공으로 던져졌다가 곧 세훈의 주먹 안으로 사라졌다. "공생관계랄까." * * *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달아오르는 태양이 강렬한 햇살을 무차별적으로 쏟아 부었다. 새하얀 반팔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이 무방비하게 햇볕을 맞이하고 짧은 머리카락 끝에 땀방울이 아슬하게 매달리는 오후였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기승을 부리는 더위와 함께 경수가 돌보는 화단에는 싱그러운 풀꽃이 무성했다. 작은 세계였지만 충분히 파릇한 생명력이 넘쳐났다. 생동하는 아름다움을 과시하듯 활짝 피어난 꽃 가까이에 코를 대고 향기를 맡다가 경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다음 행동에 대한 고민이 잠시 있었으나 결정을 내린 후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서 신발을 벗었다. 하얀 운동화 안에 양말까지 벗어 넣어둔 경수는 조심스럽게 화단 위로 올라섰다. 부드러운 흙덩이가 발바닥에 닿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기분이 좋아진다. 따사로운 햇살, 미지근한 바람, 싱그러운 풀내음. 전혀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듯 평온한 시간이었다. 계절이 바뀌고 싱그러운 녹음이 저물어 갈 때에는 아쉬운 마음마저 들 것 같았다. "바빠?" 세상과 동떨어진 시간을 음미하던 경수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도 모르게 준면이 화단 가까이 와있었다. "선배." 준면을 발견한 경수가 부끄러운 장면을 들킨 듯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다. 평소의 도경수답지 않게 허둥지둥하며 화단 아래로 내려오는 하얀 발등 위로 뜨거운 햇살이 빛났다. 시멘트 바닥 위로 경수의 발에서 묻어난 흙덩이가 부서졌다. 발끝마저 동글동글 단정한 경수의 발을 준면이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준면의 시선을 느낀 경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운동화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 단추를 풀어놓은 교복 셔츠, 온통 흙이 묻은 손등이 차례로 준면의 시야에 들어왔다. "손이 더러워서…." "괜찮아." 준면이 손을 잡아오는 것에 경수가 당황한 듯 슬그머니 주먹을 쥐고 손을 숨기려고 했다. 마른 손목 때문에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손을 펼쳐보면 손금 새로 스며들은 흙냄새가 물씬 날 것만 같았다. 준면이 처음 화단을 맡길 때엔 경수에게 변화를 바란 게 맞았으나 지금 경수의 모습은 제 생각 이상으로 훨씬 큰 변화가 있어보였다. 재미있는 일이었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손을 놓아주면서 준면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요샌 김종인이랑 잘 지내?" "아…." 경수는 종인을 떠올리며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준면과 종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항상 선배가 묻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둘의 대화에서 경수가 먼저 종인에 대해 말을 꺼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 입장에서는 선배가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으나, 준면은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종인과 저의 관계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경수는 때때로 준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래 경수는 준면을 닮고 싶어 믿고 따랐기 때문에 선배를 만난 이후로 저의 세상은 늘 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지난 일 년 동안 어느 누구보다도 선배와 가까이 지냈음에도 그의 의중을 모두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준면이 행동을 시작하는 것은 이미 모든 계산이 끝난 후에 이루어지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설명해주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합리성을 믿었고 그의 행동에 따르는 당위성에 아무도 토를 달지 않을 걸 잘 알고 있었다. 준면이 처음 저에게 화단을 부탁했을 때 결국은 거절하지 못할 걸 알았던 것처럼. "걘 그저."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가 경수는 곧 말문이 막혔다. 이전처럼 김종인은 미친 새끼라고 치부해버리면 될 일이었으나 마음속에서 납득하고 있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미 저의 세계는 이전과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고, 그건 경수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김종인은 정말 단순히 저의 세계에 침범한 침입자에 불과한 걸까. 김종인은 대체 저에게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 사이는 정말, 뭐지? 입술을 다물어버린 경수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으려니 준면이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순진하게도 허공을 바라보는 새카만 눈동자가 혼란스러운 마음을 보여주듯 흔들리고 있었다. "둘이 어디까지 갔어?" 장난스러운 웃음을 띠고 짐짓 짓궂게 말하는 준면의 목소리에 경수는 화들짝 놀라 제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적나라하거나 직접적인 단어를 쓴 것도 아닌데 선배가 할 말이라고 생각지 못한 탓에 마치 또래 녀석들이 구석에서 밥 먹듯이 하는 음담패설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런 사이 아니에요." 급한 대로 말을 내뱉었으나 말을 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자신이 말하고서도 그런 사이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 갔냐고 하면, 키스는 억지로라도 수도 없이 했다. 단지 몸이 닿는 것이라면 종인이 저를 끌어안은 것밖에 없었다. 그 미친놈의 손에 이끌려 수음한 것도 관계의 진전으로 봐야하는 걸까. 생각했다가 제 손으로 페니스를 쥐고 흔들었던 걸 떠올리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또래 아이들이 모두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경수는 깨달았다. 제가 또래 아이들보다 성적인 면에서 지나칠 정도로 담백하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제 주변에 녀석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자위에 대한 욕구를 느끼고 실행하면서 마치 자랑이라도 되는 듯 낄낄거리며 경험담을 나누곤 했다. 친구들과의 저속한 대화에 섞여들지 못하면서 경수는 점점 더 확실하게 깨달았다. 자신이 또래와 다른 것은 단순히 성적인 면뿐이 아니란 것을. 지나칠 정도로 단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모든 행동들이 또래들과는 섞일 수 없는 저만의 행동반경을 만들어내었다. 오랫동안 견고하게 다져진 세계는 쉽게 타인의 침범을 허락하지 않았고, 경수는 자신의 세계 속에 스스로 고립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애를 쓰느니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홀로 있는 것이 오히려 마음 편했다. 처음에 종인이 저속한 말을 해대고 끊임없이 만지려고 드는 게 단순히 저의 기분을 거스르기 위한 것임을 경수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종인을 경멸하고 밀어내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쉬웠다. 그러나 어느 순간 종인의 행동은 좀 더 은밀한 곳을 파고들었다. "고백 받은 거 아니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준면이 놀란 투로 말했다. 툭 던진 준면의 말에 경수의 얼굴이 더욱 혼란스럽게 변했다. 고백이라니, 그런 낯간지러운 행동을 김종인이 할리가…. 무심코 생각했다가 바로 떠올라버렸다. 이제부터 좋아하면 되잖아. 김종인이 확신에 찬 얼굴로 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때는 제게 일어날 거라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바람에 저도 경황이 없었기에 이전처럼 믿을 수 없는 행동쯤으로 치부해버렸다. 그러나 확실히 그날 이후로 모든 게 변했다. 이전에는 제멋대로 날 뛰는 김종인에 의해 가느다랗게 균열이 간 상태였다면, 그 순간을 기점으로 마치 배가 뒤집히듯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지금도 충분히 이전과는 다르게 변해버렸는데 이제 휘둘리는 걸 넘어서 속절없이 함락당할까 두려워진다. 경수는 이미 종인의 손에 의해 완전히 다른 세상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더 이상 이전처럼 종인이 불쾌하지 않다는 것 또한. 마치 손금 사이로 자연스럽게 스며든 부드러운 흙의 감촉처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경수는 혹시 싶은 생각에 준면을 바라보았다. 눈부신 햇살아래, 말없이 웃고 있는 준면의 얼굴은 여전히 싱그러웠다. "우리 경수도 이제 어른이 될라나." "……." "둘 다 참 애 같다니까." 마치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어른 아이를 보는듯한 시선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조용히 미소 짓는 경수를 보며 준면이 말했다. "난 너무 일찍 철이 들었거든." "……." "피곤한 일이야." 처음으로 속내를 비친 준면이 곧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피식 웃어버렸다. "이런 시시한 얘기 재미없다." 말을 하면서 문득 기시감이 든다 했더니, 오세훈에게도 이런 얘기를 했었다. 가장 최근에 학생회실에서 만났을 때였다. 둘이 따로 만나게 된 건 꽤 시간이 오래되었으나 제가 세훈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당사자들 외엔 아무도 몰랐다. 모든 은밀한 일에는 비밀이 필요한 법이니까. "왔어, 세훈아." 학생회실을 나간 경수가 뒤돌아보는 사이로 세훈이 문을 닫고는 책상 앞으로 다가와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뻣뻣하기는. 아무리 살갑게 얘기해도 세훈은 늘 저에게 적정선을 긋고 거리를 두었다. 저에게 편하게 말하라고 해도 도통 친숙하게 대할 줄을 몰랐다. 하긴, 아무리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진다고 해도 어차피 김준면과 오세훈이 친밀한 관계가 되는 건 아니었다. 만남이라고 해봤자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일종의 거래에 불과했으니까. 아마 이 학교에서 세훈의 광적인 정보 수집을 가장 먼저 알아챈 사람은 저일 것이다. 학교 내에서라고 해봤자 세훈의 정보 수집벽을 아는 사람도 김종인과 저뿐이니, 종인이 아니었다면 유일하게 알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세훈이 학교에 입학한 이후 가장 처음 표적으로 삼은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벌써 1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준면은 세훈을 통해 제가 미처 다 알지 못하는 학교 내의 이야기들을 들었다. 세훈이 물어다준 정보는 알게 모르게 학교일을 하는데 수월하게 쓰였고, 준면은 답례로 세훈이 요구하는 것들 중 제가 해줄 수 있는 몇 가지 일들을 해주었다. 학교 측에서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잠군 옥상의 열쇠를 구해다주는 일 같은 건 사실 그다지 힘든 것도 아니었다. 살가운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관계라고, 준면은 늘 생각했다. "도경수 보니까 생각났는데-." 평소처럼 학교 내외적인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끝마쳤을 때였다. 예상치 못하게 김종인과 도경수가 맞부딪친 이후로 세훈과 준면은 그 둘에 대해 얘기하는 일이 잦아졌다. "김종인하고 도경수에 대해서 재밌는 얘기가 있는데, 관심 있어?" "학교에서 도는 소문이라면 나도 충분히 알아." 김종인이 아침조례 시간에 다짜고짜 도경수의 뺨을 내리친 건 이미 학교 내에선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다들 김종인이 도경수를 찍어서 괴롭힌다는 소문부터 별 온갖 희한한 소문들이 교내에 나돌아 다녔다. "그런 헛소문 따위 집어치워." "그럼 뭐가 있을까-." 그제야 세훈은 제가 가져오는 이야기가 흔히 알 수 있는 시시한 소문이 아닌 걸 알면서도 준면이 모르는 척 했다는 걸 깨달았다. 준면은 무서울 정도로 모든 상황을 하나에서 열까지 다 파악하면서, 상대에게 자신을 드러낼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잘 알았다. 확실히 그에게 가장 필요한건 상황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정확한 정보뿐이었다. "학교 밖에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고 있어. 학교에서 난 소문이 밖으로 나돌지 않을 리가 없잖아." "그럼." "도경수 얘기 말야, 알 놈들은 이미 알음알음 다 알고 있다는 거지." "그래서?" "밖에 있는 놈들은 알아. 김종인이 호의든 적의든 누군가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을 쏟아 부은 적이 없다는 걸. 걔넨 직접 싸우면서 본능적으로 맞부딪쳐본 놈이니까 김종인이 어떤 놈인지는 진작 파악이 끝났거든." "결론부터 말해." "도경수가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거, 하나. 김종인이 제 감정 모르고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 둘. 잘못 하면 둘 다 동시에 훅 갈지도 모르지." "김종인의 아킬레스건이 도경수가 될 수 있겠다?" "표적이 될 수는 있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니고. 김종인 자리 노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닌데다 그 새끼한테 갈린 놈들도 길바닥에 돌멩이만큼이나 많아서, 아직 어디서 치고 들어올지 몰라." 세훈의 말에 준면이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펜으로 톡톡 책상을 두들겼다.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볼 생각 없어?" "멀리까지 가기 귀찮은데."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보자. 분명 누군가 걸릴 거야." 준면의 말에 세훈이 얇은 입술을 꾹 다물고 준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라울 정도로 모범적인 아이의 삶을 '살아내는' 김준면. 제가 여태껏 타인의 은밀한 정보를 알아내는데 유일하게 실패한 대상이었다. "넌 생각보다 오지랖이 넓어. 안 그래 보이는데, 속셈이 뭘까." "그런 거 없어. 그저 성격일 뿐이야." "일에 직접적으로 엮이는 건 싫어." 딱 잘라 말한 세훈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갔다가는 휘말리게 될 것 같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내가 무언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 안 해봤어?" "난 그런 거에 관심 없" "내가 할 수 있어. 네가 도와주면 훨씬 수월하겠지." 내뱉는 말 하나하나에 힘을 가진 준면의 목소리가 세훈을 붙들었다. 내밀한 정보를 알아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김준면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대상이었다. "너도 말야, 보통은 아니야." 알아채지 못하지만 모두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세계 속에서 용납될 수 있는 성향을 타고난다. 단지 자신은, 그리고 혹은 어떤 이들은 그런 성향이 극단적으로 발현될 뿐이었다. "이런 얘긴 시시해. 재밌는 얘기를 하자." 자신에 대한 얘기는 피하려는 준면의 태도에 세훈은 피식 웃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둘이 어른이 되는걸 보면, 즐거울 거 같지 않아?" 그래, 아마 즐거울 거야. 준면은 처음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생기를 띠는 경수를 향해 웃어 보이며, 자신의 생각을 다시 확신했다. * * * 해가 길어져 사방이 온통 깜깜해진 때에는 이미 제법 늦은 시간이었다. 백현과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는 어느 누구의 구역이라고 말하기 애매한 중간 지역이었다. 어느 누구의 구역도 아니란 소리는 특별히 눈치 볼 세력이 없어 누구나 활개를 칠 수 있다고 생각해도 좋았다. 그러나 백현과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이유는 그저 종인과 백현 둘이 만나기에 가까운 장소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굳이 나서서 눈에 띌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근처에 바이크를 세워둔 종인은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깊어지는 여름 밤공기가 무겁다. 내가 재밌는 얘기 들었다고 말했던가? 갑자기 전화한 백현은 그렇게 운을 뗐다. 꼬리를 휘두르는 몸통을 잡은 거 같은데, 어때. 흥미 있어? 묻는 말에 종인은 잴 것 없이 약속을 정했다. 흥미 없을 리가. 종인은 애초에 살살 눈치를 보다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날뛰는 자잘한 놈들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가장 먼저 도화선에 불을 붙인 놈을 밟아놔야 일이 개운하게 마무리 될 것이다. 백현은 이미 제가 찾아가기 전부터 세훈과의 만남으로 호기심이 생겨 남몰래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던 중이었다. 자신이 움직여야 할 행동반경을 철저하게 정해놓고 최대한 그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세훈이 먼저 나서서 백현을 만난 건 다시 생각해도 의외의 행동이었다. 이미 세훈 스스로도 인정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아마 세훈이 기존과 다른 행동의 틀을 깬 것은 김준면과의 만남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김준면은 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고 있는 것일까. 알면 알수록 생각보다 더 여기저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저에게 처음 다가왔을 때부터 김준면은 이미 많은 것을 파악하고 난 후였다. 타인에게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놈이니, 모든 행동이 철저한 계산아래 이루어지고 있을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대체 김준면이 원하는 건 뭘까. 아무리 생각해도 매번 도돌이표를 찍는 의문이었다. 단순히 모든 것이 저의 손 안에서 굴러가고 있다는 만족감? 혹은 자신의 개입으로 무언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 그 모든 것들이 종인의 입장에서는 김빠질 정도로 시시한 이유들뿐이었다. 종인은 한 번도 의도적으로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김준면이 하는 모든 행동에는 의도적인 냄새가 풀풀 풍겼고, 다분히 계산된 행동들로 그는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생각에 빠져 걷는데 골목 한구석이 시끄러웠다. 소란스러운 소음이 짜증스러울 정도로 귀를 긁어댔으나, 또 어디서 시시껄렁한 놈들이 잡스러운 행동을 하겠거니 싶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종인은 쓸데없이 자신을 과시하지 못해 안달 난 새끼들이 제일 꼴사나웠다. 골목을 지나치면서 힐끗, 소란스러운 곳을 보았다. 낯모르는 패거리들이 여자애 한 명을 붙잡아놓고 이상한 소리를 지껄여대고 있었다. 치마 들어볼래? 팬티에 돈 꽂아줄게. 허벅지 좀 보자. 말을 내뱉은 사내놈들이 뭐가 즐거운지 낄낄대며 저들끼리 웃어댔다. 별 지랄을 다. 기집애가 벽 쪽으로 몰린 모양새를 보아하니 패거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가느다란 어깨를 바들바들 떨리는 게 꽤 먼 거리에서도 훤히 보였다. 곧 백현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고, 약속 장소까지 얼마 남지 않은 거리였다. 늦으면 변백현이 지랄하겠지. 종인은 귀찮은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 골목 구석에 몰려있는 시끄러운 무리를 지나쳐 걸었다. "아, 씨발. 존나 귀찮게." 그러나 골목길을 지나 몇 발자국 못가고 종인은 다시 되돌아오고 말았다. 성큼성큼 걸어 낄낄대는 무리 가까이에 다가갔다. 아무도 저희들을 건드릴 거라 생각지 못한 모양인지 그들은 종인이 꽤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도 눈치 채지 못하고 시시덕거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종인은 쭈그리고 앉아 여자애 치마를 들춰내려고 장난질하는 넓은 등짝을 발로 퍽- 찼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비틀거리며 쓰러진 놈이 바닥에 나뒹굴기에 거침없이 발로 자근자근 밟아주었다. "뭐야!" 모여 있는 패거리는 모두 셋. 모두 한 덩치 하고 있어서 싸움이 붙으면 꽤 시간을 끌 것 같아 보였다. 아무래도 제때 약속장소에 도착 못할 것 같다. 변백현이 지랄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귀가 아파오는 기분이 된다. "싫다는 기집애는 냅두고 오빠랑 놀자." 싱긋 웃으면서 나름 친절하게 얘기했는데 얼굴 표정들이 영 좋지를 않다. 벽에 바싹 붙어서 덜덜 떨고 있는 여자애가 종인을 울 것처럼 쳐다봤다. 무서워서 몸이 굳은 탓인지 어쩐지 몰라도 기집애가 이럴 때 빠져나가는 민첩함도 없다. 눈이 마주친 종인이 빠져나가라는 듯 눈치를 줄때였다. "오지랖 넓네, 김종인이." 마치 저를 아는 듯 말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얼굴을 바라보았다. 종종 있었던 일이지만 쌈박질하면서 붙었던 놈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백사장에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탓에 저를 알아보는 놈들을 일일이 기억하는 건 꽤나 귀찮은 일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입술을 비틀고 악의에 찬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는 게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누구더라." "씨발, 재수 없는 새끼!" 왜 이런 놈들은 매번 얼굴을 못 알아본다고 서운해 하는지 모르겠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그렇게 보니 저 더러운 얼굴이 기분 나쁘게도 어딘지 익숙하다. 학교까지 쫓아와서 지랄지랄 했던 게 좆같아서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뿐,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하면서 활개치고 다니는 게 꽤 눈꼴사나워서 언제고 밟아줄 날만 기다렸던 적도 있었으니까. "김종인이 좀 소년원에 처박아 넣나 했더니, 재수 없게 잘만 돌아다니네." "오랜만에 만나서 서운하게 무슨 소리야. 소년원은 네가 가야지." 눈앞에 있는 놈은 근방에서 쌈박질 좀 한다는 놈들 사이에서 알아주는 저질이었다. 있는 한껏 거들먹거리면서 힘은 휘두르고 싶은데 생각만큼 주먹이 따라주질 않으니, 오히려 더럽고 치사한 짓을 더 많이 하는 게 놈의 특징이었다. 그렇게 자기 힘 과시하느라 멀쩡한 놈들 인생 여럿 망치는 게 꼴사나워서 후장에 대걸레 한 번 처박았더니 학교까지 쳐들어와서 소송이니 뭐니 온갖 난리를 쳐댔다. 그러고선 결국 저도 찔리는 게 있는 모양인지 일만 크게 벌이고 결국은 협박에 그치긴 했지만. 그 일 이후로 바닥에서 벌벌 기는 줄 알았더니 여전히 못된 짓 하면서 잘만 살아 돌아다닌다. "사내새끼 후장이나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기집애도 건들일 줄 아네." 웃으면서 엉덩이를 툭툭 두들겨 주었더니 대걸레가 꽂혔던 기억이 나는지 와락 얼굴이 붉어진다. 두툼한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제법 화가 난 모양이었다. 무서워라. 종인이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좋은 말 할 때 썩 꺼져." 어디서 좋은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종인은 신경 끄려는 듯 뒤돌아서는 어깨를 다시 붙잡았다. 병신같이, 기집애가 아직도 벽에 붙어있다. 종인이 와락 미간을 찌푸리며 눈치를 줬더니 그제야 여자애가 벌벌 떨면서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놈의 똘마니들은 여자를 붙잡아야 할지 아니면 지금 이 상황에 가담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오합지졸이다. "나랑 놀자고. 오빠가 잘 해준다니까? 또 뭐 박아줄까?" "이게, 진짜!" 와락 얼굴을 구기면서 갑작스럽게 날린 주먹치고는 무뎌도 너무 무뎠다. 더럽게 놀 줄만 알고 기본적으로 싸움에는 영 실력이 없는 놈이었다. 대체 이런 새끼가 어떻게 K고에서 기를 펴고 다니는 걸까. 가벼운 의심을 하며 주먹을 피하고 몸을 낮춰 배에 주먹을 꽂았다. 심장이 조여드는 듯 컥- 내뱉는 소리가 상쾌했다. 발로 차서 몸을 쓰러트리고 위에 올라타 정신없이 주먹을 꽂았다. 놈의 얼굴이 피 떡이 된 후에야 주먹을 멈추고 내려다봤다. 뭉개진 얼굴이 색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살덩이가 터지는 소리에 놈의 옆에 있던 패거리는 그새 도망을 쳤다. 쓸데없는데다 힘썼다는 생각에 흠씬 패주고 나서도 기분이 상쾌하지가 않았다. 손에 묻은 피를 바짓단에 대충 닦아내고 시계를 봤더니 이미 약속시간을 한참 넘기고 있었다. 변백현이 지랄 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가야겠다. 생각하고 늘어진 몸뚱어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였다. 쓰러져있던 놈이 갑자기 손목을 턱 붙잡아왔다. "뭐야." 짜증스럽게 돌아봤는데 녀석의 얼굴이 생각보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한 손으로 손목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 언제 꺼냈는지 모를 칼을 쥔 녀석이 주저 없이 바로 푹-, 배를 찔러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종인은 그대로 잠시 멈췄다. "정신 차려야지." 입안이 다 터져서 뭉개진 발음으로 말하는 걸 들으며, 종인은 칼을 들고 있는 손을 꽉 붙들었다. "이래서, 죽겠어?" 말하는데 속에서부터 울컥 비릿한 내음새가 올라왔다. 기껏 배를 찔러놓고 패기 없게 붙든 손목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진다. 씨발, 존나 아프다. 속으로 말을 짓씹으며 시선을 마주쳐 씨익 웃었더니, 놈이 덜덜 떨면서 더 깊이 칼을 쑤셔 박았다. 쿨럭. 그제야 입에서 피가 터졌다. 얼굴위로 튀는 핏방울에 녀석이 기겁하더니 붙잡은 손목을 억지로 빼고 기다시피 도망가기 시작했다. 아, 개자식. 휘청거리면서 멀어지는 뒤꽁무니를 보면서 종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배에 꽂힌 칼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어두운 길바닥에 쓰러져서 종인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백현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7통이나 와 있었다. 핸드폰 액정이 부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눈앞이 가물가물한데 선명하게 도경수가 생각난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보고 싶지. 왜 이렇게, 애가 타지. 미세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기억하고 있는 번호를 눌렀다. 손끝에 피가 묻어 번호가 잘 눌리지도 않았다. 액정에 묻은 피로 핸드폰이 자꾸 미끄러지는 걸 몇 번이나 시도해서 겨우 통화 연결음이 갔다. 눈앞이 가물거리는 걸 필사적으로 참았다. "왜." 마침내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종인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과 함께 비릿한 내음새가 훅 코끝으로 역하게 올라왔다. 저인 걸 알고 누구냐고 묻지 않는 도경수의 목소리에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다. 미친 사람처럼 자꾸 실없이 웃음만 난다. "보고 싶어." 씨발, 아프다. 아파 죽겠다. "도경수." "……." "네 냄새 맡고 싶어. 만지고 싶다. 안고 싶어…. 지금 당장." 한품에 들어오는 자그마한 몸을 끌어안고 싶다.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숨을 들이켜고 싶다. 여린 살들을 잘근잘근 씹고 싶다. 도경수, 도경수, 도경수. 보고 싶어 미치겠어. 무언가 절박하게 말하고 싶은데 그게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뇌가 고장 난 것처럼 쳇바퀴 돌듯 종인은 계속해서 같은 말들만 반복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도경수는 어떤 대꾸도 없이 조용했다. 마치 혼잣말을 지껄여대는 듯하다. 경수야, 도경수-. 희미하게 이름을 부르는 것을 끝으로,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 * * 온통 사방이 새카만 가운데 홀로 누워있는 듯하다. 아득함 속에서 지금 눈을 감고 있는지 뜨고 있는지 조차 분간이 가지를 않았다. 사지가 제 몸에 제대로 붙어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온몸이 무겁다. 이렇게까지 무기력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움찔, 손끝을 움직여 그제야 눈을 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거운 눈두덩이를 들어 올리려 애를 쓴다. 가느다란 속눈썹이 무거운 공기를 밀어내며 종인은 눈을 떴다. 눈앞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상황파악이 잘 되지 않아 몇 번 더 눈을 깜빡였다. 머릿속이 안개 낀 것처럼 부옇게 흐렸다. 느리게 숨을 몰아쉬면서 천천히 호흡을 고르는 사이 벌컥 문이 열리고 인기척이 났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아득한데서 들리는 듯하다가 곧 바로 곁에서 들렸다. 쉬지 않고 종알대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시끄러워." 생각보다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가 목구멍을 긁었다. 무거운 몸을 뒤척여 고개를 돌렸더니 저를 내려다보는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와- 죽어가는 놈 찾아서 살려놨더니, 눈 뜨자마자 하는 소리 봐라." "몸은 괜찮아?" 황당한 듯 말하는 백현의 뒤로 세훈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세훈의 물음에 안개가 걷히듯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났다. 무더운 여름 밤 공기와 어두운 골목길, 겁먹은 여자애와 모여 있던 패거리, 낯익은 얼굴, 깔아뭉갠 살덩이의 뜨거움, 휘두른 주먹이 꽂히는 감각, 선명하게 튀어 오르는 핏방울, 손목을 붙잡던 손의 악력과 예리한 칼끝이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감각까지―. 한꺼번에 모든 기억들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무거운 손을 힘겹게 들고 더듬더듬 배 부근을 만져보았다. 얇은 병원복 아래로 단단하게 감아놓은 붕대가 만져졌다. 하…. 지금 상황이 어처구니없어 웃음만 나왔다. 끝까지 치사한 새끼.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화가 치민다. "그 새끼는." "야, 참아. 내가 근처에 있었기에 다행이지, 너 골로 갈 뻔했어." "……." "넌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애써 걱정을 숨기려 백현이 짜증스러운 듯 말했다. 이제 막 깨서 몸이 무거운데 백현의 잔소리까지 들으니 죽을 맛이었다. "배때기 뚫리니까 기분 어떠냐?" "더러워." 쌈박질하면서 살이 터지고 피를 본 날도 허다했으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다쳐본 적은 없었다. 의지를 배반하고 자꾸만 늘어지는 게 제 몸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의식의 끝자락에서 절박하게 도경수를 떠올렸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울컥 속에서 치받는 피 냄새에 엉망으로 기침하면서 내내 도경수에게 일방적으로 혼자 지껄여댔다.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네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도경수는." "괜찮아. 내가 김준면한테 연락했어." 세훈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난다. 세훈의 말이란 그랬다. 세훈은 준면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내밀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때로는 그가 필요로 하는 걸 알아봐주었다. 대신 자신은 준면을 통해 혼자서는 알기 어려운 정보들에 접근하거나 일을 좀 더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게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옥상 열쇠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누가 구해다 줬을까- 말했을 때 그제야 종인은 알았다. 모범적으로 반듯한 학생회장이 원하는 걸 위해 세훈에게 열쇠를 빼돌려 준 것을. 역시 못된 놈이었네. 말했더니 세훈이 피식 웃었다. 글쎄-. 늘 누구보다 사건에 대해 깊이 알면서 한발자국 떨어져 관조하던 세훈이 결국 사건에 직접 개입하게 된 건 다 김준면 때문이었다. 원하든 원치 않았던 간에 세훈은 이미 준면에 의해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게 되었다. 오세훈을 움직이다니 하여튼 김준면도 보통은 아니었다. 완벽하게 자신을 만들어내는데 온 신경을 쏟아 붓는 놈이 이제 그 영향력을 밖의 세계로 확장시켜 타인에게까지 발휘하려 하는 거다. 또라이가 따로 없다. 미친 새끼. 착한척하는 놈인 줄 알았더니 정작 실체는 어린애 같은 놈이었다. "여튼, 기가 막힌 우연이야-." "뭐가." "너 찌른 새끼가 내가 말한 몸통이란 말이지." "고소한다고 지랄하면서 엿 먹이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안돼서 빡 친 모양이던데. 물밑에서 꽤 오랫동안 준비했어. 뭐, 혼자 실력으로는 상대가 안 되니까. 패거리도 그렇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거지. 도경수 얘기 듣고 이제 건수 잡았다 생각한 거고.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백현의 말에 이어 세훈이 사실을 확인해주듯 말을 덧붙였다. 미친놈이 정신을 못 차렸네. 쯧, 짧게 혀를 찬다. 그러니까 도경수를 건드린 것도 다 그 새끼가 작당모의 해서 일으킨 거라 이 말이다. "병원엔 얼마나 있어야해." "글쎄. 야, 너 설마." "자존심 상해."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병원을 뛰쳐나가 갈아버려도 시원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이쪽 세계에선 이쪽 세께의 룰로 해결해야 말이 맞는다. 그나저나-. "그 새끼 내가 후장 뚫어놨다고 길길이 날뛰는 거 보니 자존심 어지간히 상한 모양이던데." "어휴, 이 미친 새끼. 못하는 짓이 없어, 진짜." "근데 넌 박찬열한테 먼저 대주면서 괜찮냐." "아, 씨발!!" 와락 욕부터 내뱉은 백현이 주먹을 쥐고 종인의 어깨를 퍽 쳤다. 몸이 덜 풀린 까닭에 윽,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다. 남의 연애엔 관심 끄라고! 아마 제가 환자가 아니라면 당장 주먹으로 팰 것처럼 백현이 길길이 날뛰어댔다. 저에게 온갖 욕을 퍼부어대는 백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종인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짙은 색 밤하늘 아래 색색의 불빛들이 점점이 수놓아 있었다. 어쩐지 한숨이 나온다. 도경수가, 보고 싶다. * * * 도대체 시간이 가는 게 맞는가 싶을 정도로 하루가 무디게 흘렀다. 백현과 세훈이 있을 땐 시끄러워서 빨리 꺼지라고 했는데 옆에서 종알대는 사람이 없어지고 나니 적막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지루하다.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이렇게까지 한군데 처박혀 있는 건 성격에 맞지를 않는다. 배가 터졌지만 사지는 멀쩡한 탓에 얌전히 있는 게 더 힘들었다. 붕대를 갈을 때 얼마나 더 있어야 하냐고 물었더니 못해도 앞으로 일주일간은 병원신세를 져야한다고 했다. 죽을 맛이다. 아니, 죽어있는 기분이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지만 일주일은 족히 지난 듯 했다. 병실을 혼자 쓰는데다가 높은 층에 위치한 탓에 창밖을 바라보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피가 말라붙은 핸드폰 액정을 닦아내고 초조한 사람처럼 문자함을 들락날락 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도경수의 번호를 눌렀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에는 절박한 심정에 전화라도 했는데, 의식이 돌아오고 나니 오히려 전화를 하는 건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괜히 전화해서 아프다고 칭얼거리게 되는 것도 성격에 맞지 않고.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문득 칭얼거린다는 생각에 낯간지러워져 종인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역시 목소리라도 좋으니 위로받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온통 알 수 없는 감정들에 휘둘리며 종인은 몇 번이고 문자를 썼다 지웠다. 보고 싶다고 썼다가 지우고 뭐하냐고 썼다가 지우고 아프다고 쓸까 하다가 또 지워버렸다. 새삼스레 누군가에게 아프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는 걸 깨닫는다. 의식을 잃을 정도는 아니지만 쌈박질하면서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기는 건 예삿일이었고 심하게 긁히거나 어딘가 부러진 적도 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아프다고 말할 필요를 못 느꼈다. 부모님에게조차. 그러고 보니 이정도로 크게 다친 건 처음이라 찌르고 내뺀 놈을 붙잡아 넣느니 마느니 얘기도 나왔다. 개운하지 않은 해결방식이었다. 믿을 수도 없고 만족스럽지도 않다. 결국은 이쪽 세계의 룰대로 처리하는 게 맞는 방식이었다. 결국 한참 문자를 썼다 지웠다 몇 번을 반복한 후에야 뭐하냐는 말만 덜렁 보내고 말았다. 문자를 보내고 나서도 잘못 보냈나 싶어서 곧 후회가 되었다. 후회, 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도경수를 떠올리면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감정들이 마구 샘솟았다. 안절부절 못하면서 병실을 초조하게 걸어 다녔다. 안 그래도 무딘 시간이 더욱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다. 결국 조용한 핸드폰을 붙들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오세훈이 김준면에게 연락도 했다는데 도경수는 도통 소식이 없었다. 새삼스레 서운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또 다시 새롭게 느끼는 감정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짧은 순간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감정이 수도 없이 변화했다. 그런 제 모습이 짜증스러워 베개 아래 핸드폰을 밀어 넣었다. 지루함을 못 이기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때, 거짓말처럼 눈앞에 도경수가 있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면서 종인은 무표정하게 서있는 경수를 바라보았다. 너무 보고 싶어서 환상을 만들어냈나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로 도경수는 미동도 없었다.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워 손을 뻗을 때까지도 얌전히 있는 탓에 종인은 지금 이 상황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손끝에 닿는 피부가 부드럽다. 뺨에 닿은 손바닥에서 따뜻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꿈이라도 좋았다. 몸을 끌어안고 입술을 맞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었더니 품안에 안긴 작은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가슴팍을 밀어내는 손짓에 오히려 더 깊이 파고 들어갔더니 짜증스러운 듯 입안의 혀를 질끈 깨물었다. 꿈속이라도 여전히 도경수는 도경수였다. "이런, 내가 또 방해했나봐."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억지로 몸을 떼어낸 경수가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훔쳤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노려보는 시선에 종인은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란 걸 알았다. "진짜 도경수네." 씩 웃으며 말했더니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잔뜩 굳은 얼굴이 확 찌푸려진다. 가까이 다가온 도경수에게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는 찰나, 꽉 쥔 주먹이 매섭게 가슴팍을 퍽,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병원에 입원한지 이제 막 하루가 됐는데 갑작스럽게 주먹으로 때려대니 저도 모르게 억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팠다. 짧게 신음소리를 낸 종인이 엄살 부리듯이 몸을 움츠렸다. 아프잖아-. 웃으며 말했더니 도경수가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뒤도 안돌아보고 병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쾅-! 닫히는 문소리가 화가 나있어, 종인은 얼떨떨해졌다. 닫힌 문을 보았다가 준면이 곤란한 표정으로 웃으며 종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몸은 좀 괜찮아?" "뭐, 그럭저럭." 말 한마디 붙이기도 전에 나가버린 도경수가 신경 쓰여 힐끗 문가를 바라며 답했다. 자꾸만 시선이 문가로 향하는 걸 어쩔 수가 없다. "속상한가봐." 종인의 시선을 눈치 챈 준면이 입을 열었다. "전화 했었다며." "뭐." 또 다시 괜스레 낯간지러운 기분이 되어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는 종인의 행동에 준면이 침대 위로 걸터앉았다. "전화해서 이상한 소리만 해대고." 준면의 말에 종인은 픽,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김준면에게 제가 했을 말을 늘어놓았을 도경수를 생각하니 가라앉았던 기분이 유쾌해진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랬어." "솔직하게 말했어." ―보고 싶다고. 그 순간 생각난 건 그 말뿐이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간단명료한 종인의 대답에 준면은 쓰게 웃었다. "너도 이제 좀 어른이 되어봐."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종인은 고개를 돌려 준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기가 완벽하게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어린아이 같은 김준면을. 입가에 맺힌 부드러운 미소조차 타인에게 보여주기에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넌." 내 앞에서 어른인 척 하지 마. 착한 척 따위 안 해도 괜찮아. 혹은 피곤하게 살지 마. 따위의 생각들이 짧은 순간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몇 번 입술을 들썩이면서 뭐라고 말할까 하다가 정작 전혀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웃지 마." 불쑥 나온 말에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준면이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종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얼굴에는 의문이 한가득 이다. "넌 안 웃는 게 더 예뻐." 예상치 못한 대답인 듯 준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옅은 갈빛의 눈동자가 놀라움을 담고 종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 준면은 곧 큰소리를 내며 더 크게 웃어버렸다. 청량한 웃음소리가 삭막한 병실 안을 울렸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한참을 웃고 마침내 웃음을 멈춘 후에도 준면은 자꾸만 피식 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런가…. 웃음의 끝자락에 준면이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얼마나 있어야해?" "적어도 일주일." 물론 병원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 일주일 정도고 퇴원한다고 해서 몸이 완전히 회복되는 건 아니었다. 종인의 답에 준면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짧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긴 시간도 아니었다. 세훈에게 건네 들은 얘기들이 빠르게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기에 일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일주일이라…." 생각에 빠진 준면의 중얼거림에 종인이 피식 웃었다. "또 무슨 수작이야." "네 뒤치다꺼리 할 생각?"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어차피 제가 끝내야 할 일이었다. 퇴원할 때까지 얌전하게 앉아있는 건 성격에 맞지도 않고. 종인의 대답에 준면이 싱긋 웃었다. 역시, 착한 아이야. 준면의 말에 종인이 소름 끼치는 듯 진저리를 쳤다. 헛소리 할 거면 빨리 꺼지라고 했더니 준면이 안 그래도 바빠서- 라고 운을 뗐다. 몸조리 잘 해. 끝까지 친절하게 구는 김준면이 가고 난 후에 또 다시 적막함이 찾아들었다. 다시 돌아올 줄 알았던 도경수는 기척도 없었다. 침대 위에서 몇 번을 뒤척이다가 변백현에게 전화를 했다. "왜." "병원 나가기 전에 그 새끼 밟아 놓게 동선 파악 좀 해놔." "미쳤냐? 배때기 뚫려서?!" 핸드폰 건너편에서 와락 내지르는 목소리가 날카롭게 귓가를 찔러 들어왔다.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가 다시 핸드폰을 고쳐 쥐고 종인이 말했다. "그런 건 안중요하고." "진짜 너 같은 미친 새낀 처음 봐." "고마워." 백현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물었다. "몇 명이나 필요해?" "됐고, 너만 나와." 백현의 승부욕에 발동을 걸었다. 안 그래도 요새 심심하다던데 잘 되지 않았겠어. 단 둘이 나가겠단 소리에 잠시 침묵을 지킨 백현이 슬그머니 말했다. "걸리적거리지 마라?" 마지못해 도와주는 듯 그렇게 말하지만 이미 목소리에서 신이 난 게 티가 났다. 어련하겠어. 아닌 척 굴어도 백현은 옆 동네에서 날고 기는 싸움꾼이었다. 벌써부터 주먹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너나 잘해." "뭐 갖다 줄까?" "스패너." "OK." 할 말을 끝내고 통화를 종료하고 나니 또 다시 지루하게 시간이 흘렀다. 온통 하얀 병실 안에서 코끝을 마비시킬 정도로 진동하는 약냄새를 하루 종일 맡고 있으려니 정신이 이상해 질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탈출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 그래도 어떻게 하루가 지나 창밖으로는 또 다시 어둠이 내렸다. 색색의 불빛이 빛나는 야경을 바라보면서 손으로 배 근처를 만져봤다. 제가 퇴원을 하고 난 후에는 모두가 당연히 크게 싸움판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할 게 뻔했다. 그러면 그 전에 먼저 나서서 쳐야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움직임 따위는 쓸모가 없다. 아, 도경수 보고 싶다. 차라리 전화를 할까. 종인은 베개 옆에 둔 핸드폰을 붙들고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 고민을 하는 것조차 낯설었다. 게다가 고민의 이유가 고작 전화를 할까 말까라니, 제가 생각해도 한심한 모습이었다.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병실 문이 열렸다. 누구-. 안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가 종인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문을 닫고 들어온 도경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단정한 미간이 잔뜩 구겨져 짜증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고 저를 똑바로 바라본다. "이리 와." "……." "안아보자." 종인이 나지막이 말하자 그제야 경수가 발걸음을 떼었다. 먼 거리도 아닌데 천천히 다가오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진다. 종인은 바로 앞에 다가온 경수의 몸을 한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살결이 맞닿고 익숙한 체취를 들이켰다. 좋다…. 익숙한 내음새에 마음이 안정되었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킁킁 숨을 들이켰다. 도경수 냄새 좋다. 핥고 싶다. 여린 살결을 핥으려 혀를 내미는데 경수가 몸을 밀어냈다.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이 신경 쓰였다. 종인은 말없이 찬찬히 경수와 시선을 마주했다. 우주를 담은 투명한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건드리면 파삭- 하고 깨져버릴 듯하다.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종인은 슬며시 벌어지는 도톰한 붉은 입술을 얌전히 바라보았다. 입술 새로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네 거라며." "……." "그래서 다치지 말라며." 온통 새하얘서 비현실적인 공간에 울리는 목소리에 사로잡히고 만다. 도경수의 말에 지나치게 몰입한 탓에 숨마저도 멈출 것 같다. "근데 넌 왜." "……." "네 멋대로 다쳐?" 미세하게 흔들리던 우주가 마침내 멈춰버렸다. 질끈, 감았다 뜬 새카만 눈동자에 투명한 물기가 어렸다. "난 허락하지 않았는데." 맺혀있던 눈물이 툭, 흰 뺨을 타고 흘렀다. 턱 끝에 아롱진 눈물이 떨어져 내려 하얀 시트를 짙게 물들였다. * * * 빗방울이 떨어지듯 투명한 눈동자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려 흰 뺨을 적셨다. 본능적으로 이끌리듯 얇은 목덜미를 쥐고 종인은 허겁지겁 키스했다. 엉망으로 쏟아지는 눈물을 마시고 발갛게 달아오른 눈두덩이 위로 뜨거운 입술을 내리 눌렀다. 마음 같아선 가느다랗게 뻗은 속눈썹부터 차근차근 모조리 다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혀끝으로 투명한 눈동자를 핥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기분이었다. 도톰한 입술을 빨아들였다가 혀를 집어넣었더니 울음이 막힌 목구멍으로 나지막이 신음소리가 고였다. 동그란 어깨를 쥐고 키스를 하다가 몸을 잡아 끌었다. 속절없이 침대위로 무너져 내리는 걸 놓치지 않고 자그마한 몸 위로 올라탔다. 붕대에 감긴 덜 여문 살덩이가 아파왔으나 거절의 말을 할까 싶어 틈도 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타액으로 적셔도 부족할 정도로 갈증이 돈다. 가느다랗게 숨을 몰아쉬는 붉은 입술을 잔뜩 빨아들이고 달아오른 귓불을 씹었다. 별자리처럼 이어진 자그마한 점을 따라 키스하면서 목덜미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 도경수 특유의 체취에 뒤섞인 희미한 살 내음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잔뜩 코를 파묻고 숨을 들이켰다가 여린 살들을 잘근 씹었다. 고통인지 흥분인지 알 수 없는 감각에 나지막이 신음소리를 흘리며 경수가 어깨를 쥔 손을 바르작거렸다. 품안에 갇혀 움찔대는 작은 몸을 범하고 싶어 지독한 열이 끓어올랐다. 타액에 젖은 입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얽힌 다리 사이를 좀 더 밀착했더니 얇은 병원복 아래로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페니스가 느껴졌다. 저릿저릿한 감각에 아득해질 정도다. 허벅지 사이로 서로의 것을 가두고 양 팔에 갇힌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미처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이 눈꼬리에 매달려 있다가 눈을 깜빡이는 것에 맞춰 흰 뺨을 타고 도르륵 흘러내렸다. 물기를 머금은 새카만 눈동자가 병실의 투박한 조명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온통 산란하는 듯하다. 당장이라도 엉망으로 범하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으며 젖은 뺨을 닦아주었다. "싫으면, 지금 말해." 으르렁 거리듯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에 경수는 색색 숨을 몰아쉬는 것밖에 할 수가 없다. 내려다보는 눈빛이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해서 발끝부터 오싹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치솟았다. 피부로 느껴지는 강렬한 수컷의 체취에 질식할 것만 같다. 어쩐지 절박한 심정이 되어, 울고 싶어진다. "그만두지 마." 숨을 몰아쉬고 마른 입술을 혀로 축여 겨우 말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종인이 다시 입을 맞춰왔다. 말 그대로 잡아먹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격렬한 키스였다. 셔츠 안으로 들어온 손이 배를 타고 가슴으로 올라와 손가락 끝으로 유두를 쥐고 비틀었다. 흐, 읏…. 생소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터졌다. 셔츠를 끌어올리고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종인이 뜨거운 혀로 예민해진 유두를 핥았다가 입에 담고 빨아들였다. 오롯이 처음 느끼는 감각에 지배되어 순간 두려워졌다. 아, 잠시…. 무서워 거부의 말을 할 새도 없이 종인이 바지 버클을 풀었다. 지이익-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이렇게 선정적인지 처음 알았다. 거침없이 속옷 안으로 들어온 종인의 손이 묵직한 살덩이를 쥐고 흔들었다. 타인의 손을 타는 데 익숙지 않은 페니스가 뜨겁고 단단한 종인의 손바닥 안에서 착실하게 크기를 키워갔다. 온몸을 뒤틀면서 거부하고 싶을 정도로 이상한 기분에 발끝이 잔뜩 오므라들었다. 페니스를 쥐고 흔들던 종인이 손을 잡아 얇은 병원복 안으로 이끌었다. 손바닥으로 반쯤 부풀어 오른 살덩이가 닿았다. 제 것도 만져본 적이 드문데 타인의 것을 쥐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흔들어. 속삭이는 목소리에 홀린 사람처럼 단단한 살덩이를 쥐고 엄지로 끝을 문질렀다가 손을 움직였다. 흣…. 서투른 손길에 종인이 나지막이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늘 종인의 손길에 뒤흔들리기만 하다가 제 손에 의해 반응을 보이자 저도 모르게 흥분이 솟아 몰입하게 된다. 종인이 내뱉은 숨이 피부 위로 뜨겁게 흩뿌려졌다. 어느새 팽팽하게 잔뜩 부풀은 서로의 것을 종인이 비비기 시작했다. 순간 정상적인 사고를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단번에 척추를 타고 흥분이 치솟아 올랐다. 무서울 정도로 전신을 관통하는 쾌감에 허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손으로 쥐고 흔들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잔뜩 예민하게 달아오른 표피가 마찰되면서 아득해지는 듯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 흐, 흣…! 엉망으로 신음을 내뱉다가 그제야 병실 안이라는 걸 깨닫고 다급하게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허벅지 근육이 잔뜩 긴장한 듯 바들바들 떨려왔다. 입술을 짓씹듯이 깨물고 목구멍 안으로 신음을 내리누르면서 마침내 경수가 사정했다. 배 위에 엉망으로 흩뿌린 정액을 보며 종인이 날름, 붉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사정감으로 나른해진 경수와 시선을 마주치며 종인이 길게 정염을 토했다. 서로의 페니스에 허벅지에 배 위에 누가 쏟아낸 것인지 모를 정액이 뒤섞였다. 종인은 경수의 배 위에 쏟아낸 정액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덧그렸다. 종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피부가 타들어갈 듯이 뜨겁다. 바지만 끌어내린 채 저의 배 위에 앉아있는 종인의 모습에 그제야 부끄러워져 팔뚝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질척하게 맞닿은 아래로 종인의 밑에서 엉망으로 더럽혀진 채 누워있는 제 모습을 실감한 탓이었다. 이전에 견고하게 쌓아온 세계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무너져 내린 기분이다. 희부연 형광등 아래 흐트러진 옷가지 사이에 누워 땀과 타액으로 젖은 몸을 떨고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단 한 번도.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생소한 제 모습이 무서워 울고 싶어질 지경이다. 포식자처럼 낮게 몸을 낮춘 종인이 코끝에 쪽, 입을 맞췄다. 지독할 정도로 짙은 시선이었다. 여유로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압도적인 몸짓에 정말 김종인에게 먹히는 피식자가 된 걸 깨닫는다. 가느다랗게 떨리는 몸을 끌어안은 종인이 손을 들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정제되지 않았음에도 군더더기 없어 다정함이 느껴지는 손길이었다. 질척하게 젖은 사정액을 덧그린 종인이 손가락 끝을 비부사이에 가져갔다. 낯선 곳에 닿는 타인의 손길에 본능적으로 온몸이 굳어버린다. 제발 하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기도 하면서 동시에 멈추지 말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어 혼란스러웠다. 둥글게 여린 살들을 매만지던 손가락이 예고 없이 쑥 밀려들어왔다. 흡…!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지 못했던 곳에 침입한 손가락이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쉿…. 괜찮아." 단단한 어깨를 쥐고 바르작거렸더니 종인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손가락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부를 넓혀갔다. 어떠한 침입도 받아본 적 없는 조밀한 내부의 여린 살들이 손가락 마디를 틈도 없이 감싸왔다. 생각보다 더 따뜻하고 꽉 물어오는 탓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마음 같아선 사정 봐주지 않고 허벅지 사이를 잔뜩 벌려 엉망으로 헤집어놓고 싶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다칠 게 뻔하니 참는다. 인내를 갖고 천천히 안을 넓히면서 손가락 개수를 늘려갔다. 밀려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게 아쉬운 듯 슬적 비져 나오는 붉은 속살에 군침이 돈다. 풀어주는 게 쉽지 않지만 이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니 페니스가 더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본능대로 살아온 종인에게 폭력과 섹스는 그 경계가 불분명했다. 폭력적인 성향 때문에 가학적인 것에 거부감도 적었고 그에 특별히 어떤 의미를 두어본 적도 없었다. 둘 다 단순히 상대를 정복하는 수단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처음 해보는 섹스도 아니고 치대는 기집애들뿐 아니라 사내새끼들하고 붙어먹은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전의 경험 같은 건 지금 이 순간에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김종인에게 도경수는 이미 폭력이나 섹스를 통해 정복해야 할 대상을 넘어섰다. 어느 정도 내부가 녹진하게 풀어졌다고 생각됐을 때 발목을 쥐었다. 한손에 다 들어오는 얇은 발목이 사랑스러워 복숭아뼈에 쪽 입을 맞췄다. 발목을 쥐고 가슴 쪽으로 밀어붙였더니 아래가 훤히 드러났다. "잠깐, 이 자세 너무…." 적나라한 자세에 당황한 듯 경수가 다급하게 말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하고선 이제 와서 거부의 말을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젖은 애널이 번들거리는 게 마치 당장이라도 박아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터질듯 부푼 페니스를 쥐고 아래에 맞췄더니 움찔, 떨리는 몸이 흥분을 부추긴다. 슬그머니 귀두 끝을 살짝 밀어 넣었다. 따뜻한 내부가 틈도 없이 감싸오는 게 벌써부터 황홀했다. 발목을 그러쥔 손마디 마다 힘이 잔뜩 들어간다. 천천히 허리짓을 하면서 푹-, 페니스를 밀어 넣었더니 경수가 우는 소리를 내며 얇은 시트를 그러쥐었다. 볼품없이 구겨지는 하얀 시트처럼 손끝마저 하얗게 질렸다. "흐, 아, 아파." 아프다는 말에 참지 못하고 더 거세게 허리짓을 했다. 반쯤 밀려들어갔던 페니스가 살짝 빠져나왔다가 뿌리 끝까지 퍽, 치고 들어갔다. 단번에 치고 들어오는 페니스에 온몸이 반으로 쪼개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데 그것조차 마음대로 허락되지 않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 팔뚝을 깨물었다. 여린 살덩이가 깨물리는 감각과 아래를 찢어낼 듯 치받으며 들어오는 고통이 동시에 느껴져 혼절할 것 같다. 와중에 종인은 지나칠 정도로 빡빡한 내부에 페니스가 잘릴 것 같았다. 겨우 끝까지 다 밀어 넣고 숨을 몰아쉴 때 도경수는 이미 펑펑 울고 있었다. 눈물로 짓무른 얼굴마저 못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견고한 성을 무너트리듯 천천히 빠져나갔다가 다시 밀려들어갔다. 내부에 가득 들어차있는 게 버거운 듯 움찔거리면서도 빠져나가는 게 아쉬운 듯 자꾸만 조여 댔다. 여린 살을 긁어대는 페니스에 진저리치며 어쩔 줄 모르는 듯 경수가 고개를 저었다. 바들바들 떨면서 침대 시트를 쥐는 손을 등 뒤로 둘러주었더니 단정하게 깎인 둥근 손톱 끝이 절박하게 등을 파고들었다. 빠졌다가 치고 들어가면서 여기저기 찔러대는 통에 잔뜩 깨물린 잇새로 어쩔 수 없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흣, 읍, 윽…! 억눌린 신음소리가 더 흥분을 부추겼다. 잔뜩 끌어안은 채 점점 더 급박해지는 몸짓에 맞춰 병원 침대가 나지막이 끼긱대며 우는 소리를 내었다. 한 번에 깊이 박아 넣었다가 안에서 뭉근하게 움직였더니 순간 등을 파고든 손에서 힘이 탁 풀렸다. 틈도 없이 단정했던 도경수가 제 밑에 깔려 더운 숨을 내뱉으며 땀과 타액으로 잔뜩 흐트러져있다고 생각하니 뇌를 치는 쾌감이 치솟았다. "벌려." 하얀 허벅지 안쪽을 손바닥으로 깊게 누르며 다리를 더 벌리기를 종용한다. 고통과 쾌감으로 엉망이 된 도경수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다리 사이를 더 벌렸다. 씨발. 저도 모르게 욕지기가 나왔다. 모조리 다 먹어치우고 싶다. 마음 같아선 오독오독 살도 발라서 뼈까지 다 씹어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뇌를 뒤흔드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하얀 피부에 붉게 자욱이 날 정도로 세게 쥐고는 거칠게 안으로 드나들었다. 퍽, 퍽 처박을 때마다 질척하게 젖은 살덩이가 마찰되는 소리가 울렸다. "안에다 쌀 거야." "흐, 윽…, 흑…." 속삭이는 목소리에 온몸으로 진저리를 친다. 고통인지 괴로움인지 아니면 무서울 정도로 느껴지는 쾌감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자의로 다리를 벌리고 종인을 안에 품고 있다는 것 자체가 경수에게는 세상이 뒤바뀌는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네 안에 쌀 거라고."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흥분이 단번에 온몸을 관통했다. 저도 모르게 안에 들어와 있는 종인의 것을 더욱 조이고 절박하게 종인의 몸을 끌어안았다. 누군가 안으로 들어온 것만으로도 생소한데 그것으로도 부족해 안에 잔뜩 흔적을 남긴다는 게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 혼절할 지경이다. 다급하게 몸을 끌어안는 경수를 느끼며 종인은 제 아래서 헐떡이는 몸을 틈도 없이 가득 끌어안았다. 더 깊이 들어갈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저를 품은 내부에 잔뜩 사정했다. 내장으로 퍼지는 뜨끈한 기운에 아래가 더 움찔거렸다. 미처 다 채워지지 못한 사정액이 틈사이로 줄줄 흘렀다. "흐윽…." 사정을 끝낸 종인이 하얀 가슴 위로 고개를 떨구자 경수가 나지막이 흐느꼈다. 이전에 알고 있던 모든 올바르다고 믿었던 것들이 세상이 끝나듯 모조리 다 끝나버렸다. 김종인이 만든 새로운 세계에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내 거야." 귓가에 뺨에 눈두덩이에 코끝에 마침내 입술에 키스를 퍼부은 종인이 작게 속삭였다. 내 거야, 도경수. 확신하듯 재차 속삭이는 목소리에 경수는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그래. 네 것이다. 결국 나의 세상을 무너트린 너의 것이다. 나도. 그리고 너 또한. * * * 하루 중 마지막으로 상태를 점검하러 간호사가 병실에 들리는 시간은 매일 저녁 8시. 제법 길어진 해가 완전히 져버린 시간이었다. 낮이 길어지기는 했으나 해가 진 후 어둠이 내리는 속도는 빨랐다. 낮에 진료를 보고 새로 붕대를 감았기에 저녁에는 아픈 곳이나 불편한 것이 없는지 묻는 게 거의 다였다. 힐끗, 바라본 창밖에는 어둠의 장막 사이로 드문드문 불빛들이 빛나고 있었다. 어디 불편한 데는 더 없고? 습관처럼 묻는 목소리에 종인이 고개를 돌려 간호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싶은 착각마저 들 정도로 진득한 시선이었다. 빤히 바라보는 종인의 시선에 무심코 얼굴을 붉힌 간호사가 손을 들어 뺨을 만지작일 때였다. "누나, 나가서 산책 하고 오면 안돼요?" 종인의 말에 화들짝 놀란 간호사가 바로 안 된다고 말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새카만 눈동자로 조용히 올려다보며, 시선을 마주친 종인이 싱긋 웃었다. "얌전히 걷다가 금방 돌아올게요."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은밀했다. 며칠 전, 종인은 억지로 꿰매놓은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상처가 새로 터져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대체 뭘 하다가 이렇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종인이 혼자 있기 너무 지루해서 운동했다고 말했다. 몸도 성하지 않은 애가 대체 얼마나 심심했으면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간호사들 사이에 알음알음 돌던 질 나쁜 소문들이 떠올라 종인의 말이 사실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종인은 침대 시트마저 새로 다 갈아엎다. 왠지 모르게 붉어진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는 듯 해 마주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근처에서 한 바퀴만 돌고 와." 허락을 구하는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게 자꾸만 마음이 약해져 어쩔 수 없이 허락해주었더니 종인이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씨익 웃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 그간 뒤에서 수군대던 질 나쁜 소문 같은 건 다 거짓말인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고등학생 주제에 칼에 찔려 뱃가죽이 찢겨져 온 걸 보면 사실일 가능성이 훨씬 높기는 했으나, 이미 간호사의 머릿속에서 그런 사실은 사라졌다. 간호사의 대답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종인은 최대한 서두르지 않으며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땅에 발을 딛는 게 여전히 몸이 덜 풀린 느낌이라 짜증스럽다. 오늘은 제가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이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제가 원하는 행동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만 움직여줬으면 좋겠다. 몸 상태가 완벽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처리해야 할 일을 미루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모든 싸움은 몸 상태가 완벽하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누가 그 순간에 가장 몰입하는가. 육체를 배반하는 정신만으로도 종인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무리하게 움직였다고 해서 설마 죽기야 하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죽었을 거라면 이미 칼에 찔렸을 때 뒤졌겠지. 병실을 나서면서 종인은 손으로 배에 단단히 감은 붕대를 만져보았다. 억지로 봉합해놓은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다시 터져서 아무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그러나 상처가 아무는 시간이 아무리 걸린다 해도 결국은 도경수를 얻었으니 상관없다. 관계를 끝내고 난 후, 붕대 위로 스며들은 피가 하얀 병원복 위로 짙게 배어나왔다. 격렬하게 움직여 상처가 벌어진 탓이었다. 흉 지면 안 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놀라 바라보았더니 단정한 미간이 잔뜩 구겨져있었다. 애써 숨기려 하지만 숨기지 못한 짜증스러움이 얼굴에 묻어났다. 갈증을 채우느라 몇 번이고 물고 빨아댄 도톰한 입술이 새빨갛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 순간에도 종인은 붉은 입술 새를 파고들어 도경수가 내뱉는 숨을 모두 들이 키고 싶었다. 엘리베이터를 탄 종인은 1층을 눌렀다.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같은 병원복을 입은 사람들이 층층마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내렸다. 병원 특유의 텁텁한 공기가 숨이 막힌다. 빨리 나가고 싶다. 1층에 도착한 종인은 병원 뒤로 나있는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병원 뒤에는 가벼운 운동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정원을 꾸며놓고 산책로를 만들어놓았다. 일찍 잠드는 환자들이 많아 어두운 가운데 밤 산책을 하는 사람들은 드문드문 있었다. 어느새 높게 뜬 노오란 달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일을 벌이기에 좋은 날씨였다.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느긋하게 걸으며 종인은 백현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약속장소에 서 있는 어둠에 휩싸인 인영을 보고 백현이라고 생각했던 종인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사이 인영은 점점 더 생각과 다른 윤곽을 드러내었다. 잘못 알아볼 리 없다고 생각했으나 확신을 하지 못한 것은 설마 하는 생각이 좀 더 컸기 때문이었다. "도경수." 마침내 얼굴을 확실히 알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에야 종인은 이름을 불렀다. 어둠에 가려져 있던 몸이 한발자국 앞으로 나와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받았다. 반듯한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이 미지근한 여름 바람을 타고 미세하게 흔들렸다. "오세훈이 말해줬어." "미친놈이네, 그 새끼." 오늘 제가 백현과 몰래 나간다는 건 당사자인 둘을 제외하면 세훈밖에 알지 못하는 이야기였다. 자기가 아는 걸 이렇게 쉽게 떠벌리다니. 여태껏 종인이 알고 있던 세훈이 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긴- 이미 김준면과 만나면서 오세훈 또한 달라졌다. 새삼 도경수와 저의 세상 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올려다보며 경수가 입을 열었다. "난 너한테 싸우지 말라고 말 안 해." "……." "네가 어차피 이렇게 살 놈이란 거, 잘 아니까." 덤덤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너에게 나를 강요하고 싶지 않아." 예상외의 말에 종인은 눈만 크게 떴다. 서로가 서로를 허물어트리고 각자의 세계가 변했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의 영향력 아래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도경수는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원하는 대로 자신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에도 온전한 저를 존중하겠다고 말한다. 언제고 항상 저의 예상을 뛰어넘는 도경수. 그 순간 아마 앞으로도, 어쩌면 평생. 종인은 경수를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이 들었다. 말을 끝마친 경수가 한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도경수가 좁혀 다가온 거리에, 새삼스럽게 가슴이 뛴다. "그치만 함부로 다치지 마." "……." "내 거니까." 세상이 멈춘다. 미지근한 밤공기도, 어디선가 우는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도, 형형히 쏟아져 내리는 달빛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오로지 도경수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흠집 내는 거 싫어." "안 다치고 돌아올게." 천천히 고개를 숙였더니 하얀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부드러운 뺨을 감싸 쥐고 따뜻한 입술 위에 입술을 마주 대었다. 발끝에서부터 간지러울 정도로 기분 좋은 감각이 퍼졌다. "가." 입술을 떼자 경수가 속삭였다. 도경수의 모습을 온전히 시야에 담았다가, 발을 떼었다. "어우, 소름!" 언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먼발치서 백현이 소리쳤다. 백현에게 다가가면서 종인은 웃음을 터트렸다. 기분이 좋았다. 어쩐지, 예감이 좋다. * * * 병원을 빠져나와 근처 공중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백현이 건네주는 스패너를 받았다. 손에 느껴지는 묵직함이 적당했다. 스패너를 뒷주머니에 꽂아 넣고 백현과 시시껄렁한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걸었다. 목표한 장소까지는 멀지 않았다. 어차피 좁은 바닥이었다. 옆 동네도 아니고 활동반경이 겹치는 탓에 늦은 시간에 녀석의 패거리가 몰려있을 곳이란 뻔했다. 게다가 녀석의 패거리는 언제나 소란스러워 눈에 쉽게 띄었다. 눈에 띄지 못해 안달 난 것처럼. 오락실 안은 게임기에서 나는 온갖 뿅뿅거리는 전자 음악 소리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좁은 골목길처럼 이어진 크고 작은 게임기 사이를 지나쳐 걸으며 목표한 사냥감을 찾았다. 열렬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게임에 몰입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슬롯머신 앞에 앉아있는 덩치를 발견했다. 모니터에 들어갈 것처럼 코를 처박고 스틱을 이리저리 놀리면서 녀석은 히죽 웃다가 화를 냈다가 혼자 난리도 아니었다. 제 뜻대로 안되는지 게임기를 부술 듯이 두들겨대던 녀석이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돈이 다 떨어진 모양인지 옆에 있는 놈에게 삥을 뜯었다. 사냥감을 포착한 순간 백현과 시선을 주고 받았다. 이 근방은 밤마다 녀석의 패거리들이 주로 모여 노는 장소였기 때문에 혼자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재밌어?" 게임에 정신이 팔려 누가 뒤에 오는지도 모르고 있는 녀석에게 말을 건네었더니 뒤도 안돌아보고 손을 대충 휘저었다. 정신 빠진 놈. "그딴 기게 말고 나랑 놀면, 더 재밌을 텐데." 그제야 잔뜩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놈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여태 맥아리도 못 추스르고 병원에 처박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얼굴을 보니 놀랍기는 한 모양이었다. 커다란 눈동자에 공포가 스미는 것을 보니 순식간에 기분이 즐거워진다. 시선이 마주쳐 씨익 웃어주고 녀석이 일어서 도망가기 전에 머리채를 붙잡았다. 생각보다 반항이 심해 얌전히 있으라는 뜻으로 주먹으로 얼굴을 갈겼다. 금방 두툼한 입술이 터져 주먹에 피가 묻었다. "김종인, 이, 씨발." 피와 침을 튀겨가며 녀석이 멱살을 마주 잡아왔다. 그래, 이래야 재밌지. 얌전하면 싸우는 재미가 없다. 말초신경이 발작하듯 흥분하기 시작했다. 휘어잡은 머리채를 쥐고 그대로 게임기 모니터 위에 처박았다. 쾅! 게임보다 더 드라마틱한 소리가 만족스럽게 울렸다. 씨발, 뭐야! 머리가 모니터와 치받는 크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울리자 녀석의 패거리들이 몰려왔다. 뒤에서 관망하고 있던 백현이 슬렁슬렁 종인에게 다가가려는 녀석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고작 두 명. 다른 패거리들은 근처 다른 곳에서 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뭐야, 이 좆만한 새끼는!" 소문으로는 옆 동네에 싸울 때 개가 되는 미친놈이 있다고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래봤자 다른 동네일인 모양인지 놈들은 백현의 얼굴을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좆만한 새끼래. 종인이 낄낄거리면서 말을 되짚어 주었더니 백현이 자존심 상한 듯 종인을 노려보았다. 웃지마, 씨발아. 종인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린 백현이 저를 만만하게 보는 놈들을 삐뚤게 쳐다보았다. "좆만한 새끼? 니 좆이 나만큼 커?" 확인해 봐야겠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현이 주먹을 날렸다. 싸울 때 백현의 가장 큰 장점은 작은 체구에서 오는 민첩함이었다. 빠르게 상대의 얼굴을 가격하고 틈을 파고들어 연달아 주먹을 날렸다. 시답지 않은 놈들은 백현에게 맡기기로 하고 녀석의 머리채를 쥐고 질질 끌고 오락실 밖으로 나갔다. 무게가 무거운데다 어찌나 반항을 해대는지 잘 끌려오지도 않는 걸 악을 쓰면서 억지로 끌고 나갔다. 길바닥에 패대기쳤더니 덩치가 중심을 못 잡고 나동그라져 바로 일어나지 못하도록 발로 둔탁한 몸뚱어리를 계속해서 찼다. 고깃덩이는 여러 번 때려서 다져놔야 질이 좋다. 속절없이 맞고 있던 놈이 발길질을 피해 이리저리 나뒹굴다가 비틀거리면서 일어나 주먹을 휘둘렀다. 얼씨구, 무서워라. 살짝 뒤로 물러섰더니 녀석이 뒷걸음질 치다가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건 이제부터였다. 근처에 고등학교가 많은 탓에 종인이 활동하는 지역은 세력 싸움도 잦고 싸움판의 크기도 가장 컸다. 근방을 모두 쥐고 흔드는 건 종인이었지만 그 밑으로도 온갖 세력들이 저들끼리 매일 치고 박고 싸우는 게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종인은 거의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들어왔다고 봐도 좋았다. 근처에 놀이터가 하나 있는데 녀석의 패거리들이 아지트를 삼아 밤이 되면 놈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집에 늦게 돌아가는 교복 입은 놈들을 잡아다 돈도 뜯고 심심하면 패기도 하고 지난번에 봤던 것처럼 지나가는 애먼 여자애를 붙잡아다 희롱도 했다. 자정이 넘어가면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면서 가스도 빨 게 분명했다. 할 수 있는 온갖 저열한 짓은 다 하는 놈이니 앞으로 하고 싶은 일들도 무궁무진하겠지. 종인은 예상대로 놀이터를 향해 달려가는 녀석의 뒤를 쫓았다. "뒤 빠지겠네." 어느새 싸움을 끝내고 쫓아온 백현이 거구가 굴러가듯 뛰는 모양새를 보며 낄낄댔다. 놀이터에 도착한 종인은 뒷주머니에 꽂아둔 스패너를 만져보았다. 제가 준비한 성대한 이벤트의 하이라이트다. 꾸역꾸역 모인 녀석의 패거리들은 몇 명인지 가늠도 오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백현과 둘이 등을 대고 선 종인은 피가 미친 듯이 휘도는 흥분을 느꼈다. 가슴이 두근거려 터질 것 같았다. 쏟아지는 주먹을 피하고 몸을 낮춰 상대의 틈을 파고들어 정확히 힘이 끝나는 시점에 타격을 가했다. 물 흐르듯 유려하게 춤을 추듯 화려하게 움직인다. 종인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녀석들에겐 관심이 없었다. 저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였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놈들을 막무가내로 밀어 헤치고 뒤에 숨어있다시피 한 녀석을 찾았다. 도망가려는 하는 녀석의 목덜미를 쥐고 손으로 단번에 제압해 쓰러트렸다. 거구가 모래바닥에 쓰러져 먼지가 풀썩 피어올랐다. 살덩이가 손바닥에 달라붙을 정도로 마구 뺨을 내리쳤다. 코끝으로 훅 끼치는 먼지 섞인 땀 냄새와 거친 숨소리, 피부에 바로 느껴지는 살덩이의 촉감 그 모든 게 감각을 일깨운다. 몸 아래 깔린 살덩이가 두려움으로 덜덜 떨리는 게 바로 느껴졌다. "병원에 있는 줄 알았는데." "아아. 네 덕에 병원에 처박혀 있느라 심심해서." 땀에 젖어 이마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쓸어 올려 주었다. …흐윽. 녀석이 울음을 참으려는 듯 숨을 들이켰다. "놀아주려고 왔지." 바지 뒤춤에 꽂아둔 스패너를 꺼냈다. 작지만 둔탁한 무게가 손에 딱 맞았다. 스패너를 들고 파들파들 떨리는 녀석의 뺨을 톡 쳤다. "재밌는 경험시켜줄게." 흥분될 정도로 치솟는 아드레날린에 자꾸만 실없이 웃음이 났다. 아마 오늘 밤, 저에게는 물론 놈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밤이 될 것이다. * * * 자야겠다. 생각하고 누웠다가도 한참을 뒤척여 결국 자는 걸 포기하고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침대 맡에 놓아둔 핸드폰을 더듬어 찾았다. 환하게 빛을 발하는 화면에 눈을 살짝 찌푸렸다가 시간을 봤다. 새벽 2시가 넘었다.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자야할 시간을 한참 넘겼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잠이 오질 않는다. 착실하게 분침과 시침을 움직여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계처럼 기계적으로 반듯한 생활을 해왔다. 일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일상이었다. 그러나 김종인을 만난 이후로 모든 게 어긋나고 비틀어지고 파괴되었다. 무서울 정도로 저의 일상 속에 파고들어 모든 걸 뒤흔들어 놓는 김종인. 경수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지금 종인이 걱정되어 잠들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는 괜찮다고 말했으면서 뒤에서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이전의 김종인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녀석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차피 그렇게 살 놈이다. 때로 저에게까지 그 영향력이 미치는 게 피곤하기는 하지만, 막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저도 김종인에 의해 바스라져 결국은 부서지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모습을 지키려고 계속해서 발버둥 칠 테니까. 그러나 역시 자꾸만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문득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어 전전긍긍하던 종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전전긍긍이라니, 제가 생각해도 김종인과 너무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제멋대로 감정을 쏟아 부으며 내 것이니 다치지 말라고 해놓고서 정작 종인은 크게 다쳐 입원까지 했다. 종인의 살갗을 파고드는 날카로움을 생각한다. 피를 쏟으며 어느 어두운 길바닥에 쓰러져있을 모습을 떠올리면 누군가 심장을 자근자근 밟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전에 종인이 저의 표면에 내었던 생채기들과는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가슴 속 깊숙이 선명하게 상처가 새겨진다. 종인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다니, 제가 생각해도 놀라운 변화였다. 손을 들어 얇은 셔츠 위로 손을 얹었다. 아플 정도로 가슴이 세게 뛴다. 다치지 마. 절박하게 바라게 된다. 너 또한 오롯이 나의 것이니. 아득한 별빛처럼 흘러가는 고요한 새벽. 적막함을 깨트리듯 갑작스레 핸드폰이 울렸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할 사람은 한명 뿐이었다. 급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통화버튼을 누르고 귓가에 핸드폰을 가져다대었다. 건너편에서는 특별한 말도 없이 나지막한 숨소리만 들리지만 알 수 있다. 괜찮아? 혹은 잘 됐어? 하는 모든 물음들이 온통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져, 경수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찰나의 순간 영겁과 같은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종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귓가에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상쾌해,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이제 편하게 잘 수 있을 것 같다. "경수야." 왜. 대답은 속으로만 했다. 어쩐지 여태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쑥스러워진다. "하고 싶어."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고막까지 범하는 것 같았다. 바로 곁에 있지 않은데도 폭력에서 오는 흥분감으로 종인이 잔뜩 고양되어 있다는 게 느껴졌다. 희미한 피 냄새와 먼지 섞인 땀 냄새마저도 훅 끼치는 듯하다. "내 이름 부르면서 해줘." "……." "빨리. 네 목소리 듣고 싶어." 네 신음소리도.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손끝에서부터 자잘하게 소름이 돋았다.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의 감촉마저 신경 쓰일 정도로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다. 입술을 슬며시 깨물며 경수는 핸드폰을 붙들고 머뭇거렸다. 종인의 손길에 의해 제 것을 쥐고 흔들었던 적은 있으나 혼자 수음해 본 적은 없었다. 단순히 쾌락을 위해 저의 손을 더럽히는 것은 아직도 크게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다만 종인과 관계를 맺고 난 후에 이전보다 제가 거부해왔던 모든 것들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거라는 기대는 있었다. 관계를 맺는다, 는 말을 새삼 생각한다. 도경수와 김종인이 관계를 맺는다. 그 단순한 문장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그제야 깨닫게 된다. 서로의 쾌락을 위한 행동뿐이 아니다. 결국은 상대방이 타인과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 제가 먼저 말해놓고도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었는지 종인은 바로 대답이 없었다가 곧 큭큭거리며 웃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핸드폰을 귀에 고정시킨 채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 편하게 누웠다. 낮은 목소리가 듣기 좋은 울림을 가지고 귓가를 간지럽혔다. 입 벌리고 손가락 집어넣어. 빨아. 혀를 이용해서. 종인의 말에 따라 입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을 핥았다. 키스 한다고 생각해. 정성들여서 핥아. 마치 말 잘 듣는 어린아이가 된 듯하다. 경수는 종인의 말대로 손가락의 마디까지 느낄 정도로 질척하게 핥았다. 핸드폰 너머 종인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타액으로 젖은 손가락이 입안을 가득 채워 기분이 이상해진다. 네 젖꼭지 만지고 싶다. 목소리뿐인데 저도 모르게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만져. 명령하듯 고압적인 목소리에 이끌려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타액에 젖은 손가락 끝이 긴장한 유두 끝에 닿았다. ……읏. 어째서, 이렇게까지 흥분한 것일까. 스스로 의문이 들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살아 날뛰었다. 핥고 싶다. 깨물고 싶어. 종인의 말에 흥분으로 심을 세우기 시작한 젖꼭지를 비비다가 꾹 눌렀다. 흐, 읏. 억눌린 신음소리가 잇새로 터졌다. 너 섰지. 종인의 말에 그제야 다리 사이에 흥분한 페니스를 느낀다. 무의식중에 허벅지를 오므리면서 몸을 잔뜩 웅크렸다. 씨발. 종인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침대에 누워서 제가 말하는 대로 손을 움직여 몸을 만져대는 도경수를 생각하니 머리끝까지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핸드폰을 쥔 손끝까지 힘이 바짝 들어갔다. 들어가고 싶다. 들어가고 싶어. 도경수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미칠 것 같다. 페니스 쥐어. 끝에 둥글게 만졌다가, 기둥 잡고 흔들어. 수음하는 도경수를 상상하며 종인은 같이 페니스를 흔들었다. 손바닥 안에서 점점 크기를 키워가는 페니스에 사정감이 몰려와 허벅지 근육이 잔뜩 긴장했다. 경수야, 이름. 이름 불러줘. 신음소리에 뒤섞여 절박하게 말한다. 신음을 참고 싶은 듯 계속해서 억눌린 소리를 내던 경수가 나지막이 우는 소리를 내었다. 흐… 읏, 흑…. 김, 종인. 저의 이름을 부르는 도경수의 목소리만으로도 마구 폭죽이 터지는 듯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바라졌다. 온몸이 황홀할 정도로 무섭게 쾌감으로 물들었다 "네 냄새 맡고 싶다." 사정 후 녹진녹진한 감각에 종인이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종인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경수는 멍하니 더러워진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빨고 싶고. 핥고 싶고. 넣고 싶고. 수화기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계속해서 범해지는 기분이 된다. 수치를 모르는 놈. 정말 생각한대로 다 내뱉는다. "사랑하고 싶어." "……." "너랑 사랑하고 싶다." * * * 연기를 깊게 빨아들여 폐부에 고이는 감각을 느꼈다가 다시 내뱉는다. 학생회장이 은밀하게 얻어다준 열쇠는 여러모로 유용했지만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어느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담배를 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등교 시간이 시작되어 교문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무리를 바라본다. 색도 모양도 다른 것 하나 없이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지만 분명 하나하나 모두 다 다른 개체이다. 필터까지 타들어간 담배를 발밑에 버리고 운동화로 밟아 불씨를 끄고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철제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곧 이어 툭, 어깨를 치는 손길에 세훈은 고개를 돌려 얼굴을 확인했다. "빨리도 온다." 세훈의 타박에 종인은 피식 웃어넘길 뿐이었다. 종인은 생각보다 입원이 길어져 며칠 전에야 퇴원할 수 있었다. 빨리 퇴원하고 싶어서 안달을 하던 종인이었기에 사실 병원 측에서 만류한다 하더라도 원한다면 퇴원을 감행할 수도 있었다. 세훈의 생각에 종인은 입원 중간에 쌈박질을 하러 나가서 상대를 완전히 박살을 내고 온 탓에 일부러 퇴원하지 않았다. 한동안 조용히 지내는 게 좋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종인의 일을 적극적으로 만류하지는 않았으나, 사실 세훈은 후에 일어날 법한 일들이 염려되었다. 이전에 학교까지 쫒아 와서 고소를 하네 마네 지랄을 떨고 결국 크게 싸움판까지 벌렸던 놈이니 반응이 얌전할 리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훈의 예상과 달리, 종인이 녀석을 죽사발을 만들어놓은 지 일주일이 넘어가도록 상대편은 쥐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세훈의 말에 종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별 거 없는데." 그날 밤의 싸움은 이 일대에서는 거의 전설이 되었다. 종인이 배가 찢겨 입원해있는 상태인데다 입원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싸움이 벌어질 타이밍을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단 둘이 다른 녀석의 구역에 쳐들어 간 것만으로도 무모한 결정인데 그 날 저녁 종인과 백현은 결국 놀이터에 있는 녀석들을 모조리 다 제압하기까지 했다. 이 흥미진진한 사건에 대한 소문은 입에서 입을 타면서 나날이 크게 부풀어만 갔다. 종인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놈은 며칠을 울면서 바닥을 기어 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아마 한동안은 그의 자리를 위협할 일은 없을 것이다. 종인은 여전히 그의 세계에 군림하는 독보적인 왕이었다. "도경수다." 때마침 교문을 통과하는 경수를 발견하고 세훈이 말했다. 곁에 선 종인이 시선을 돌려 교문을 통과하는 경수를 내려다보았다. "간다." 세훈의 어깨를 툭 치고 종인은 옥상을 나섰다. 매일 아침, 학교에 도착한 도경수는 교실에 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본관 뒤 화단을 찾았다. 종인은 경수가 교실에 들렀다가 나올 시간을 계산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화단 앞에 쭈그리고 앉은 조그마한 등이 보였다. 도경수는 여전히 제 시간에 칼 같이 등교를 했다.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다소 길기는 했으나 여전히 교칙에 어긋나지 않는 단정하게 잘린 머리카락과 빳빳하게 잘 다린 칼라의 하얀 교복 셔츠, 목 끝까지 단정하게 채운 단추와 넥타이, 끝이 둥근 손톱까지. 표면상으로는 무엇 하나 변한 게 없어 보이지만, 우리의 세계는 이미 변했다. 쪼그리고 앉은 등 뒤로 다가가 슬며시 눈을 가렸다. 이파리를 만지던 손길을 멈춘 경수가 조심스럽게 눈을 가린 손을 잡았다. 체온과 체온이 맞닿은 곳에서 기분 좋은 온도가 피어올랐다. 천천히 손을 잡아 끌어내린 경수가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웃음이 터진다. "도경수." 자리에서 일어선 도경수가 저의 부름에 시선을 맞춰왔다. 세상의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끝나고 같이 가. 할 말 있어." 경수의 말에 종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따 봐. 제가 할 말을 끝낸 경수가 다시 관심을 화단으로 쏟아 부었다. 말아놓은 듯 조그마한 몸을 내려다보다가 종인은 자리를 떴다. 길고 지루한 방학식이 끝나자마자 종인이 교실로 찾아왔다. 경수는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반 아이들을 지나쳐 종인에게 다가갔다. 가자. 저의 말에 얌전히 꼬리를 내린 종인과 함께 나란히 걸어 교실 건물을 벗어났다. 교문으로 걸어가는 길에 본관 앞에 서있는 준면이 보였다. 멀리서 시선이 마주쳤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는 준면의 입가가 희미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멀리 있었지만 경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싱그러운 푸른 잎을 무성하게 틔운 화단과 함께 여름 방학이 시작 되었다. 방학동안 종종 나와서 화단을 돌보겠지만 아마 개학을 하고 새로운 계절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화단은 점점 저의 손도 떠날 것이다. 시원섭섭한 기분이 든다.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종인이 어깨에 팔을 걸쳐왔다. "무거워." 말했으나 종인은 들리지 않는 체했다. 품에 끌어안긴 꼴이 되었으나 별다른 제지를 하지는 않았다. 나란히 걷는 사이 종인은 어깨를 목덜미를 귓불과 머리카락 끝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학교에서 집까지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으나 오늘따라 유난히 거리가 짧게만 느껴졌다. 골목길 너머 파란 대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집 앞에 다다라서야 경수는 앞에 마주 보고 선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종인은 내린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얌전히 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맹수의 모습에 웃음이 날 것만 같다. "손." "뭐?" "손 내밀어봐." "내가 개냐." "예뻐해 달라며." 하….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지만 종인은 결국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내밀은 종인의 손 위로 경수는 조심스럽게 제 손을 얹었다. 겹쳐진 손가락이 사이사이로 얽혀들어 갔다. "네가 좋은 것 같아." 말을 했다가 경수는 곧바로 다시 고쳐 말했다. "아니, 솔직해질게." "……." "네가 좋아." 몇 번이고 서로의 세계를 부수어내면서 계속해서 다시 상처 입을 수 있다. 그러나 나쁘지 않다. 그래, 나쁘지 않다. 저의 말에 종인이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미친 거지. 너 같은 놈을." "사랑해." 덧붙이는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 종인이 성급하게 말했다. 단단하게 얽힌 손가락을 마주 잡고 경수는 말을 이었다. "넌 너무 빨라." "……." "난 너보다 느리고." "……." "그치만 열심히 쫓아갈게." 조금만 기다려줘. 저의 말에 멍하니 서있던 종인의 얼굴 위로 물감이 퍼지듯 서서히 웃음이 퍼졌다. 얽힌 손가락 사이로 두근, 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느껴졌다. 오늘은 좋아해지만 내일은 사랑해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할게. 낯설고 아름다운 너. 너를 받아들인다. 나의 세상 속으로.